[경로당 찾아간 '성폭력 예방교육'] "손주 고추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꼬? 조심해야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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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부산 부산진구 부강경로당에서 열린 '노인 대상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참가 어르신들이 '오엑스(OX)' 퀴즈를 풀고 있다.

"남사스럽게 이 나이에 무슨 성폭력 예방 교육…." "나이 구십이 다 돼 가는 우리 할매들한테 뭔 일이 있을라고!" "정신이 똑바로 배겼으면 그럴 리가 없제~."

'2017년 찾아가는 폭력 예방 행복한 우리 마을 만들기' 일환으로 지난 17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부암3동 부강경로당을 찾은 장옥경 성폭력예방교육 강사(부산여성가족개발원 위촉)가 '노인 성폭력 예방 교육은 필요할까요?'라고 거듭 묻자 어르신들이 보인 첫 반응이다.

"성폭력 성·나이와 무관하게 발생
손자도 성적 수치심 느낄 수 있어
피해자 우선 배려하는 마음 필요"

교육 전 "남사스럽다"던 어르신들
OX 퀴즈 풀며 "세상이 바뀌었네"

■노인 성폭력 예방 교육이 필요한 이유

이날 모인 어르신은 모두 15명.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회장을 맡은 77세의 김미자 어르신을 제하면 전부 80대. 남성 회원으로 유일하게 교육에 참석한 경로당 총무 조종희 어르신도 올해 팔순 잔치를 했다.

장 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교육이 필요 없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지금도 폭력이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몸이 무기'라는 표현도 간혹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몸이 무기라는 표현대로라면 예쁜 사람, 젊은 사람한테만 나쁜 일이 일어나야 하지만 3개월 된 갓난아이부터 팔십 먹은 노인까지 나이 상관없이, 몸뻬를 입었든 치마를 둘렀든, 식스팩 복근을 가졌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폭력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폭력은 폭력뿐 아니라 다른 범죄로까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예방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체념해 버리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 질문은 '나에게 성이란?'이었다. 장 강사는 "일반적으로 성은 부끄러운 일,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성적인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선 성에 대해서도 평소 갖고 있는 생각을 입 밖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에 이상이 생기면 빨리빨리 치료하는 게 정상이듯 생식기 부위가 가렵거나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성폭력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아무리 친숙한 관계라도 허락 없이 상대방 몸을 만져선 안 됩니다. 만지지 말라고 하면 안 만져야 합니다. 구별을 해야 합니다. 친근감과 성희롱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요. 성폭력은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모든 성적인 접촉(행위)이 해당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러자 조 총무가 농담처럼 딴지를 걸었다. "내가 좋아서 만지는데 그게 성폭력과 무슨 상관있어요?" 그러자 할머니들이 한꺼번에 지청구를 댔다. "남자들은 다 저렇게 생각한다니까요! 그냥 모른 척 무시하고 우리끼리 계속 교육해요."

하지만 장 강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남자들은 다 저렇게 생각한다고 체념해 버리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교육을 마친 뒤 성폭력 예방 문구가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단체 사진을 찍는 모습.
■귀여운 내 손자라도 함부로 고추 만져선 곤란

이번엔 장 강사가 울고 있는 한 아이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었다. "이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간 뒤 장 강사가 설명했다.

"남자아이도 성적수치심, 성적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 이미 소중한 내 몸(부분)은 누구도 만져선 안 된다는 걸 배웠고, 또 그게 싫다는 걸 확실히 아는데 귀여운 내 손자라는 이유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생식기를 툭툭 건드리게 되면 성폭력 행위가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옛날 옛적에 어른들이 '아이고 우리 손주 고추 한 번 따 묵자~'라고 무심코 했던 말과 행동이 성폭력이었던 거죠."

그러자 할머니들이 수군댔다. "아이고 무서워라. 내 손주 고추도 내 맘대로 못 만지나? 그게 성폭력이라고? 엄마야, 세상에 뭔 그런 일이 다 있노!"

장 강사는 아이가 예쁘다고 뽀뽀를 하는 것도 성폭력에 해당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어르신들의 반발 수위는 더 높아졌다. "아이고 희한한 세상이네~ 자식하고 손자한테 그렇게도 못 하면 우야노. 뭔 세상이 이렇노! 인자는 손주들한테 뽀뽀하는 것도 일일이 물어보고 해야 되나?" 그러자 장 강사는 "연습 삼아서라도 물어 보세요. 그러면 '와~ 우리 할머니 세련됐네!'라고 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일견, 관습대로 살아온 어르신들에겐 익숙하지 않을 순 있지만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에겐 내 몸에 대한 소중함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어른들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사소한 말 한마디, 일상에서부터 변화를 주는 게 필요하다"면서 "오히려 어른들에 대한 체계적인 성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도 말했다.

■성폭력은 피해자 잘못 아냐…배려할 수 있어야

이 밖에 장 강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요즘 누구나 갖고 있는 휴대폰에 의해서도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즉, 신체 접촉 없이도 야한 그림이나 동영상을 보고 공유하거나 지나가는 여자의 다리나 치마 밑을 몰래 찍는 등의 행위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어르신들에게 당부했다.

이날의 교육을 마무리하면서 가진 '오엑스(OX)퀴즈' 마지막 문제. "성폭력은 피해자 잘못이다?" 아뿔싸, 어르신의 3분의 1 이상이 "안 따라가면 되지!"라며 피해자 잘못이라고 답했다. 장 강사는 애써 담담한 듯 "피해자 잘못 아니죠!"라며 "폭력은 저지른 사람이 나쁜 것이지 피해자는 피해자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피해자는 피해를 당해서 아프고,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아프기 때문에 우리라도 성폭력 피해자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얼마나 아팠겠니'라고 배려해 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폭력 신고 번호는 112로 통합돼 있다"고 알려준 뒤 "어르신의 경우, 휴대폰에 단축키를 저장해 두고, 경로당과 집으로 가는 사이에 설치된 비상벨 위치도 파악해 놓으면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이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2017년 찾아가는 폭력예방교육'은 여성가족부, 전국 17개 시·도, 중앙 폭력예방교육 지원기관(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부산여성가족개발원 등 전국 권역별 18개 지역 지원기관에서 폭력예방교육 의무 대상 공공기관(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직유관단체, 각급학교 등)을 제외하고 20명 이상 일반 국민 또는 민간 기관·단체 신청자에 한해 3월부터 11월까지 무료로 진행됐다. 이날 부강경로당 교육이 부산에선 마지막이었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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