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거부자 위한 대체복무 아직도 시기상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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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1939년 일제강점기, 일본의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총을 들기를 거부한 조선인 38명이 체포된다. 이 중 5명은 신념을 지키다 옥사했고, 나머지 33명은 해방이 되고나서야 석방되었다.

이른바 '등대사(燈臺社) 사건'의 전말이다. 양심에 따라 총을 들기를 거부한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 자료집'에는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카드가 채록돼 있는데, 당시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상기록카드도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현대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병역을 기피하는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 '등대사 사건' 이후 지금까지 병역거부로 옥살이를 한 사람은 1만 9000명이 넘는다. 이들을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역시 북한과 대치중이라는 특수한 안보상황과 악용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시기상조라는 여론이 강하다.

국방부 차관을 지낸 백승주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9월 언론을 통해 "집총 거부자에게 면죄부를 줘 병역 형평성을 훼손해선 안 된다"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맞서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는 것은 우리나라 안보 상황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백 의원은 또 "너도나도 '총 못 들겠다'고 하게 되면 병력 체계의 근간이 흔들린다. 집총거부자가 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덧붙였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처벌 받는 이들은 매년 500여 명에 달한다. 통상 재입영 대상이 되지 않는 최소 처벌수위인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는다.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을 거부한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병역법 제88조 1항이 근거다.

상급 법원에 호소해도 소용없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과 2011년 병역법 제88조 1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해 제기된 헌법 소원에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대법원도 2004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근거로 10년 넘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출소 이후에도 전과 기록에 발목 잡힌다. 사법시험 합격자 가운데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로 기소된 백종건(33) 변호사는 변호사 등록을 취소당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백 씨는 2011년 병역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만 200건 이상 맡으며 변호사로 활동했다. 유죄 선고에 항의하며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지난해 3월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확정 받았다.

사법연수원 시절 백종건 변호사의 모습.
백 씨는 지난 5월 출소해 변호사 재등록 신청을 했다. 그러나 심사기관인 대한변호사협회(변협)는 지난달 24일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며 거부했다. 변호사 결격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변호사법 제5조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집행이 끝난 후 5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변호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일률적인 등록금지사유가 아니다. 같은 법 8조에 따르면 변협이 변호사 등록신청을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변협이 재량을 가지고 등록거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변협 측도 고심 끝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김현 변협 회장은 등록심사위원 8명 중 3명이 '양심의 자유가 중요하고 최근 무죄 판결이 많이 나왔다'며 등록에 찬성했지만, 나머지 5명은 실정법 존중, 안보 상황, 병역의 의무의 중요성 등을 이유로 등록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다음날인 25일 즉각 성명을 내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을 무시한 반인권적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또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간절히 다른 방식을 원했으나, 우리 사회가 다른 방법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발로 감옥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변호사를, 감옥 밖에서까지 5년 동안 잡아두어야 될 필요성이 무엇인가?"라고 지적했다.

백 씨는 결과에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최근 하급심 판사들이 무죄 판결로 병역거부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덕분에 이 문제가 부각되고 있고, 이 같은 판결이 정부에게 압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백종건 변호사의 7살 때 모습. 그가 4살이었던 1988년 아버지 백승우 씨가 병역거부로 수감되었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가족 중 3명이 양심적 병역거부로 감옥에 가야 했다.
실제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무죄를 인정하는 1심 판결이 올해 들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2004년부터 지난 9월까지 선고된 하급심 무죄판결은 총 52건인데, 이중 과반인 35건이 올해에 집중됐다.

김현호(21) 씨가 받은 판결도 그중 하나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김 씨는 전쟁을 연습하거나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종교적 양심에 따라 입영을 거부했다.

김 씨는 같은 종교 신도 3명과 함께 지난 8월 8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최경서 부장판사는 이들의 행위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병역거부권의 행사"며 "병역법 제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김현호(왼쪽 두번째) 씨와 함께 재판을 받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부산지방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미소 짓고 있다.
최 판사는 판결문에서 "양심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며 국가는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그 제한을 최소화할 헌법적 의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연간 징집인원의 0.2%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현역에 종사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위태롭게 한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1심 판결에 대해 김 씨는 "최근 무죄 선고가 이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대했지만, 막상 판결을 받고 나니 얼떨떨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기소되어 상급심에 오르더라도 신념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또 "병역을 면제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합당한 대체복무를 시행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법관들 역시 대체복무제 도입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최경서 판사는 "국가가 대체복무제 등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종교나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청년들을 처벌하는 것은 헌법의 '과잉금지원칙'을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제 사회도 같은 문제를 꼬집어왔다.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와 국제사면위원회는 한국 정부를 향해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 및 대체복무제 도입을 수차례 권고했다. 유엔 인권위원회도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권리라는 입장을 줄곧 밝혀오고 있다.

한국처럼 특수한 안보 상황 속에서 대체복무를 시행한 선례도 많다. 군사적 분쟁과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러시아, 아르메니아, 대만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영국은 세계대전 중에도 대체복무제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상급 법원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범계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해마다 많은 청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해 실형을 선고 받아 교도소에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이를 방관하고 있다"며 "대체복무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이에 대한 공론의 장도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이어 "이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수호해야 하는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된 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변화의 물결은 다른 곳에서도 관측된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사법부 요직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우호적인 인사들이 연달아 임명되고 있다. 문 대통령 본인도 대체복무제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대체복무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달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유남석 후보자도 과거 논문을 통해 비슷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역시 지난 9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개인적으로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며 "궁극적으로 입법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제도 도입으로 해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시행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5월 31일 대체복무제 법안을 발의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생각도 같다. 박 의원은 "대체복무제 도입이 특별히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니다"며 "4주간의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유의미한 활동을 하겠다고 한다면 이분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전했다.

박 의원이 발의한 '병역법과 예비군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대체복무 요원이 대체복무 기관 등에서 사회복지 또는 공익과 관련된 강도 높은 업무를 수행하되, 집총을 수반한 업무인 국군, 경비교도대, 전투경찰대 등에 복무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또 기간은 현역의 1.5배로 하고, 합숙을 기본으로 한다.

박 의원은 "새 정부가 의지가 있어 통과 가능성이 예전보다는 높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민적 공감대가 예전보다 높아졌다. 설문조사를 해보면 대체복무제 도입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 1월 발표한 '국민인권의식조사'에 따르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은 46.1%로, 2005년(10.2%)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지난해 성인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2%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지만 대체복무제 도입에는 70%가 "찬성한다"는 응답을 보였다. 찬성 이유로는 '감옥보다는 낫다(26%)', '국민의무를 다해야 한다(16%)' 등이 있었다.

조경건 에디터 mul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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