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탐식법] 속 편한 음식 아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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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채널을 돌리는데 드라마 하나가 손을 붙들었다. 내 나이 또래 부부가 이혼을 하자마자 우연히 과거로 돌아가게 되고, 둘은 서로를 처음 만났던 18년 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각자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 때문에 대학 다니던 풋풋한 시절이 생각났고, 지금 아픈 엄마가 건강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면 참 행복하겠다는 부질없는 소망이 떠올라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하지만 먹먹함도 잠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남자 주인공이 몸에 좋은 걸 찾아 먹는 장면 때문이었다. 몸은 스무 살이지만 이미 서른여덟 인생을 살아본 주인공은 죽어도 먹기 싫었을 '엄마표 양배추즙'을 거뜬히 마시고 친구가 먹기 싫어 건넨 보약을 소중히 받아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렇지, 저 아까운 것을! 이 어리석은 것들아, 세월 흘러도 남는 건 그런 거야!'를 외쳤다.

일요일 저녁 남편과 나는 집에서 가까운 쌀국숫집을 찾았다. 17년 가까이 함께한 우리 부부는 작년까지도 쌀국수를 사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쌀국수는 라면에 비해 면발이 쫄깃하지 않았고 국물 맛도 밍밍했다. 그랬던 우리가 올해부터는 쌀국수를 자주 찾게 되었다. 이유는? 먹고 나면 '속이 편한' 음식이어서. 자극적이고 칼로리 높고 저렴한 음식을 자주 찾던 우리는 이제 먹고 나서 배가 덜 아픈 음식, 편하게 소화되는 음식을 찾게 되었다. 좋은 음식을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 '건너편'에도 이런 우리와 비슷한 연인이 나온다. '두 사람은 평소보다 달게 잤는데, 저녁상에 오른 나물 덕이었다. 낮은 조도로 점멸하는 식물에너지가 어두운 몸속을 푸르스름하게 밝히는 동안 영혼도 그쪽으로 팔을 뻗어 불을 쬐는 기분이었다. 잠결에 자세를 바꾸다 도화는 속이 편하다는 느낌을 몇 번 받았다. (중략) 직장 상사들은 삼십대 중반이야말로 체력과 경력, 경제력이 조화를 이루는, 인생에서 가장 좋을 때란 말을 자주 했지만 도화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이수도 바야흐로 '풀 먹으면' 속 편하고, '나이 먹으며' 털 빠지는 시기를 맞았다는 걸.'

노량진에서 고시원 생활을 하던 둘은 밥을 나눠주는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도화는 '도화 씨가 좋아하는 것 같아 잔뜩 집어왔다'며 교회 배식판의 동그랑땡을 챙겨주던 사내 이수와 '얼추 개 수명과 비슷한 십 년'여를 함께 보냈다. 하지만 도화는 '자신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 저녁에 이수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도화 몰래 전세금을 빼서 공무원 공부를 다시 시작한 이수의 잘못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한 커플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안달하고 한 커플은 과거의 시간을 끝내고 싶어 이별한다. 속 편한 음식 맛을 알게 되는 어른의 시간은 슬픈 것일까? 쌀국수를 먹고 나면 남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야겠다. 우산 하나로 가을비 맞으며 길을 걷다가 '선배 어깨가 많이 젖었어요'라고 내가 말하고, '내 왼쪽 어깨는 방수된다'고 그가 허세 떠는, 손발 오그라드는 드라마를 한 편 찍길 기대하면서. dreams0309@hanmail.net


이정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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