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헌재소장 공백 장기화,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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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민호 변호사

올 5월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과 동시에 사법기관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했다. 변화의 출발점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비법조인 출신 대학교수를 법무부장관으로 앉혔고, 기수와 서열을 파괴하며 검찰 고위 간부를 임명했다. 거기까진 순탄했다. 대통령의 인사 권한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헌법재판소장 임명 과정에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국회 재적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이다. 여야는 서로를 탓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후로 지금까지 헌재소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 있다. 올 1월 31일 박한철 전임 소장 퇴임 이후 9개월째다.

제동 걸린 사법기관 개혁 인사
9개월째 비어 있는 헌재소장

헌재소장 임기 법 규정 없지만
재판관·소장 동시 지명 가능

대통령의 사법부 인사권
삼권분립 정신 존중해야

그 와중에 청와대는 국회에서 헌재소장 임명 동의가 부결된 김이수 재판관의 헌재소장 권한대행 자격을 계속 유지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헌법재판관 간담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들었다. 그러자 재판관 전원은 대통령에게 헌재소장과 공석인 재판관 1명을 신속히 지명해 줄 것을 요청했고, 문 대통령은 지난 18일 뒤늦게 유남석 광주고등법원장을 재판관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헌재소장까지 겸하는 재판관을 지명하지 않아 또다시 논란에 불씨를 지폈다.

유 고법원장을 일반 재판관 후보자로만 지명한 것에 대해 청와대는 입법 불비를 문제 삼았다. 헌법에는 재판관 임기만 6년이라고 돼 있을 뿐 헌재소장 임기 규정은 없으므로 국회가 이를 입법으로 해소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헌재소장 공백의 책임을 사실상 국회로 떠넘긴 셈이다. 헌법재판소법 제12조에 따르면 '헌법재판소장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재판관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돼 있다. 다만 6년의 임기를 보장받는 재판관과 달리 소장은 임기 규정이 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 해묵은 논란이 있었다. 즉, 신임 헌재소장이 임명되면 새로 6년 임기가 시작되는지 아니면 재판관 잔여 임기만 소장으로 재직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논란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간명하다. 대통령이 새 헌법재판관을 소장으로 동시에 지명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인사청문회도 한 번만 거치면 되고 헌재소장의 임기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된다. 헌재소장 임기 규정은 그 후에 개헌이나 입법을 통해 명확히 하면 되는 것이다. 1988년 헌재가 설립된 이래 1~3대 헌재소장은 모두 재판관 임명과 동시에 헌재소장으로 임명됐다. 참여정부 때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강국 전 대법관을 헌재소장 및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동시에 지명한 사례가 있다. 청와대가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어렵게 돌아가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이수 임명동의안 부결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권한대행 자격으로 헌재 국감에 출석했다가 문전박대 당한 김 재판관에게 대통령이 사과의 뜻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자신의 비전과 정치철학에 맞는 인사를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자신과 코드가 맞는 헌재소장을 6년짜리로 임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만일 유남석 광주고법원장이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재판관으로 임명되면 문 대통령은 유 고법원장을 다시 헌재소장으로 지명할 공산이 크다. 어차피 지명할 것을 왜 지금 동시에 지명하지 않느냐는 야당의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이 심정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김이수 재판관을 가급적 조금 더 헌재소장 권한대행 자리에 앉혀 두고 싶어 하는 계산이 깔린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대통령의 '코드 인사' 자체를 무작정 비판해서는 안 된다. 김이수 재판관의 임명동의안 부결을 두고 헌재소장은 대법원장과 달리 헌재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에 그칠 뿐인데 야당이 정략적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인사권은 삼권분립의 취지를 존중하는 틀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헌법은 대통령이 헌재소장을 임명할 때 국회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이 사법부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 장치인 것이다. 입법·행정·사법은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는 삼권분립의 정신이기도 하다. 작금의 헌재소장 공백 장기화 사태를 두고 청와대와 여야는 서로를 탓하며 삼권분립 정신을 들고 나온다.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헌법재판소가 소장이 있는 9인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재판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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