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열풍] 추억, 때로는 선명한 컬러보다 아련한 흑백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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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 만삭·커플 기념, 모녀 여행 등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아름다운 한때를 추억하기 위한 흑백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을 찾고 있다. 사진은 부산 국제시장 내 '근대흑백사진관 그리다'에 진열 중인 각종 흑백사진. 강원태 기자 wkang@

여행지에서 사진관을 찾는 일이 쉬운 건 아니다. 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산 중구 신창동4가 64-2 국제시장 6공구 B동 2층에 자리한 '근대흑백사진관 그리다'(대표 이충엽·30)라면 말이 다르다. 긴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1일 오후 '그리다'에 죽치고 앉아서 흑백사진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을 만났다. 부산 사람도 있었지만 부산을 찾은 여행자가 많아서 놀랐다. 하루 18개 팀 정도 예약을 받는다는데 주말에다 연휴가 겹친 이 날은 만당. "왜, 사진을 찍을 수 없나? 먼 곳에서 왔는데 어떻게 안 되느냐!"고 읍소하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느라 진땀을 뺐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하는 부산 흑백사진 열풍의 진원지 '그리다'에서 만난 사진사 이 대표와 흑백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 이야기를 담았다.

국제시장 흑백사진관 '그리多' 인기
하루 18개 팀 촬영… 주말 예약 필수
타지 여행자들도 입소문에 방문

아날로그 감성 소환에 함박웃음
컬러와 달리 꾸미지 않은 매력
만족도 큰 만큼 재방문율도 높아

■국제시장에서 흑백사진관을 연 사연

'근대흑백사관 그리다' 외부 전경. 강원태 기자
"많이 기다려야 돼요?" 사진관 앞을 지나는 사람 열이면 열 다 물어본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예약제입니다."

대여섯 평이 될까 말까, 국제시장 내 계산법으로는 2.5칸의 창고를 개조한 아주 작은 사진관이다. 구형 카메라 외에도 LP판과 턴테이블, 빛바랜 태극기 액자, 나무의자, 백열등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품도 가득하다. 창틀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쪽 벽면은 천으로 빛을 가렸고, 반대쪽은 통로여서 완전히 오픈된 구조다. 사진을 찍는 사람 외에 대기할 곳조차 여의치 않은 좁은 공간. 하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땐 그랬지' 하는 심정으로 다들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리다'의 시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산경제진흥원이 진행한 청년창업몰 공모 사업에 선정돼 국제시장 609에 입주한 게 지난해 11월. 3년 전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은퇴한 이 대표의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취미 사진이 생업이 된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사진을 떠올렸다고. 대학(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졸업)에서 인문학과 지역학을 두루 배우면서 지역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는 점이 국제시장 입주를 부추겼다.

이 대표는 "이렇게 협소하고 오픈된 공간에서 사진관을 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면서도 "흑백 인물사진을 찍겠다는 그 자체가 과거의 향수에서 출발한 만큼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부산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국제시장이 주는 아이덴티티, 그 메리트가 마음에 들었다"고 밝혔다. 임차료 지원은 내년 6월까지.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 언젠가는 사진관을 토대로 문화공간으로 확장하고 싶다는 게 이 대표의 목표다.

바쁜 이 대표를 붙들고 오래 이야기할 여건이 안 돼 사진 찍는 그의 등 뒤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한참을 지켜보며 간간이 말을 붙여 나갔다.

사진 촬영 시간은 커플일 경우 5분 남짓. 가족 단위는 개별 사진이 추가돼 장수가 많아지기 때문에 20분 안팎이 소요됐다. 주말과 공휴일 예약은 서둘러야 하지만 평일엔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즉석에서 신청하고 전화번호를 남겨 놓으면 빈 시간에 연락을 주기도 한다.

이 대표 옆에는 올 6월에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 심유경 씨가 늘 함께한다. 이 대표가 사진 촬영에 집중한다면 아내 심 씨는 예약 스케줄 관리부터 디지털 인화 작업, 포장 등 나머지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창업부터 함께한 두 사람은 사진관을 하면서 결혼식도 올렸다.

■흑백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
이충엽 대표.
주말에다 추석 연휴 기간이 시작돼 가족 단위 촬영자가 많았다.

경기도 수원에서 왔다는 이시종·변선화 씨 가족은 군 제대 후 대학교 2학년에 복학한 아들과 같은 학년 딸, 그리고 고교생 딸을 둔 5명으로 구성됐다. '봄'이라는 강아지 한 마리도 데리고 왔다. 대구 시댁에 가기 전에 여행 삼아 부산에 들렀다고 변 씨가 말했다. 그는 "아들이 군대 가기 전 가족사진을 찍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실천으론 못 옮겨서 아이들이 어릴 때 이후로 가족사진은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사진관에서 만난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관에서 찍는 가족사진이 처음이거나 아주 오랜만이었다.

이번엔 신혼 5개월째라는 젊은 부부 차례다. 시댁으로 가기 전 부산으로 3박 4일 여행을 하면서 사진 촬영 예약도 했다. 부인 정예원 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아기를 낳으면 다시 찾을 거라고 했다. 이 대표는 "여행자에게 시간은 금인데도 일부러 사진관을 찾는 분들이라 더욱더 신경이 쓰인다"고 털어놨다. 이날은 만날 수 없었지만 만삭의 임산부도 종종 사진관을 찾는 게 요즘 트렌드 중 하나란다.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임신한 상태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게 그들이 털어놓는 이유다.

서울에서 영상 관련 일을 하는 김영지 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부산 고향집에 내려오면서 사진관 예약을 했고, 부모님과 남동생을 일부러 국제시장까지 나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온 부모님은 가족사진을 찍는 걸 알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집에서 입는 평상복 그대로 나오라고 해서 뭔 일인지도 모르고 나왔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평소처럼 나오시라고 부모님께 부탁드렸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어쩌면 컬러가 아닌 흑백사진을 찍으려고 했던 이유도 꾸미지 않은 가족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가족일수록 이 대표는 '옛날 느낌 그대로, 바르게 손발 모으고, 허리 펴고'를 강조했다.

갑자기 사진관이 시끌벅적해졌다. 남편 직장 동료라는 세 가족이 강은영 씨 예약으로 경남에서 찾아왔다. 이제 두 돌 혹은 세 돌을 지냈을까 싶은 아이가 한 명씩 있는 가정이다. 가족끼리, 부부 별로, 세 가족 모두, 아이들끼리 사진을 찍는데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특히 부모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떼놓고 부부 사진을 찍을 때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단체 사진도 만만찮았다.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니 다른 아이도 덩달아 울었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핑크퐁' 유튜브 영상을 찾아서 틀었다. 아이들 표정이 달라졌다. 강 씨는 "아이들 커 가는 모습도 남기고 추억도 만들 겸 매년 이 시기에 사진을 찍기로 했다"면서 "흑백사진은 인위적이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고 고르는 순간도 추억
흑백필름과 다양한 액자들.
부산에 살고 있다는 한 커플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내내 신청자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들 커플뿐 아니라 이 대표의 등 뒤에서 몇 시간을 지켜본 바로는 사진을 찍는 순간순간이 그들에겐 한바탕 축제였다. 문득, 사진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고,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이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다'만 해도 한 번 사진을 찍은 사람이 가족 혹은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재방문율이 높은 이유다. 최근엔 모녀끼리 여행을 와서 사진을 찍는 경우도 많이 늘었다. 그때마다 이 대표는 '나는 저 나이에 뭘 했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단다. 가끔은 혼자서 사진관을 찾는 이들도 있다.

통상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흑백사진은 디지털 프린트를 이용해 즉석에서 인화 작업까지 마친다. 한 팀 촬영이 끝날 때마다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카드 정보는 아이패드로 넘겨져 본인 마음에 드는 사진을 직접 고르도록 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웃음꽃이 피었지만 사진을 고르면서도 다들 즐거워했다.

사진 가격은 무보정 4×6인치 흑백사진 한 장에 5000원. 저용량이지만 파일을 원할 경우 인화본에 한해서 메일로도 준다. 4×5인지 후지 즉석 흑백필름을 사용한 '근대흑백사진'은 비용(장당 3만 원)이 좀 더 비싸지만 그 느낌이 좋아서 하루에 한두 팀 정도 이용한다. 이마저도 필름이 단종돼 6, 7개월 정도 촬영 분량밖에 남아 있지 않단다.

이 대표가 생각하는 흑백사진의 매력은 담백함. 그가 특별히 하고 싶은 사진 작업이 있을까?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느낌을 더 끄집어내는 인물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포토그래퍼가 아닌 사진사로 불리고 싶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근대흑백사진관 그리다'의 사진 촬영 예약은 네이버 예약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쉬는 날은 국제시장 609가 문 닫는 1·3주째 월요일. 문의 010-7212-7484.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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