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금관가야는 변한시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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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철 부산대학교 명예교수·고고학

경북대 주보돈 교수의 최근 저서 <가야사 새로 읽기>의 핵심 내용인 '금관가야는 변한 시대이며, 대가야야말로 시종 가야의 중심'이라는 주장에 대해 학계는 매우 냉담한 편이지만, 여기에 관심 있는 일반인은 매우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전기 가야의 중심은 금관가야(김해), 후기 가야의 중심은 대가야(고령)'라는 통념을 뒤엎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주 교수의 논리는 극히 단순하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각각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상징하는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고령 지산동고분군이다. 그런데 그는 지산동고분군의 축조 시작 시기를 1세기 정도 끌어올려 4세기 중엽부터이며, 따라서 이보다 이른 시기인 대성동고분군은 저절로 3세기대가 되므로 변한 시대 무덤이라는 것이다. 주 교수의 이러한 연대관은 과연 합당한 것일까.

지산동고분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은 지산동 73호분이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이 이 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자료를 다방면으로 치밀하게 연구해 도달한 연대관은 5세기 중엽 전후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의 경우 절대연대 도출의 근거는 너무나 많다. 일례로 대성동 91호분에서 전연(前燕)과 관련되는 마구(馬具)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묵서명의 기년(紀年)의 검토에 의해, 무덤의 연대가 354년 또는 366년이 분명한 중국 랴오닝성 원대자벽화묘 출토마구 직전의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는 마구에 정통한 동아시아 고고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처럼 4세기 중엽의 대형분인 이 91호분은 대성동고분군의 대형분 중에서 이른 시기에 속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대성동고분군은 4세기대 중심의 유적임이 드러난다.

또 대가야가 시종 가야의 맹주였다는 주 교수의 주장은 괜찮은 것일까. 그의 논리대로라면 아라가야, 소가야 지역에 처음부터 대가야 양식의 토기가 출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에서 대가야 양식의 토기는 나오지 않았으며, 대가야 멸망 무렵인 6세기 중엽이 되어야 겨우 소수 출토되고 있다. 이 점과 함께 대가야가 여러 가야의 중심이었다면, 고령에서 근거리인 영남의 남해안에 즐비한 양항(良港)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한 데도 굳이 호남 동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우회하여 섬진강 유역을 대외교섭의 창구로 삼았다는 것도, 대가야가 남쪽의 아라가야와 소가야를 제압하지 못하였음을 단적으로 말한다. 한마디로 이 사실은 주 교수의 주장과 달리, 대가야도 서력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南征)으로 촉발된 당시 가장 탁월한 정치체였던 금관가야의 와해로, 몇 그룹으로 재편된 가야 중의 일개 지역 그룹에 지나지 않았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번 저서를 비롯해 주 교수의 평소 논리에서 항상 느끼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고분군 등에 대한 연대 비정의 근거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고고 자료의 연대 결정은 거의 전적으로 고고학의 영역이다. 여기에 문헌사학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음에도, 주 교수는 목청만 높이고 있는 것이다. 만용에 가깝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한 고고학의 연구 성과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는데도 이에 대한 몰이해 때문인지, 그는 이러한 성과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 문제의 해결은 지극히 간단하다. 고고학자들은 정밀한 연구를 통해 지산동 고분군의 가장 이른 시기의 고분인 73호분의 연대가 5세기 중엽 전후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마찬가지로 주 교수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면 이 고분의 연대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4세기 중엽임을 증명해야 한다. 과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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