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반란, 액티브 에이징] 2. 자긍심으로 찬란한 패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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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청기 끼고 할게요"… 무대 서고 싶은 열정 '못 말려'

19일 열린 제 10회 실버패션쇼 예선전에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워킹을 선보이고 있는 참가자들. 노인생활체험관 교육지원센터 제공

이미 일주일 전부터 하루하루가 패션쇼였다.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이 만장일치로 '좋아요'를 외친 옷을 차려입었다. 거울 속 멋쟁이에게 속삭인다. '화이팅!'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담담했는데 대기실에 도착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긴장한 탓일까. 주위를 둘러보니 부산 패셔니스타는 여기 다 모인 듯하다. '세상에! 나 말고도 멋쟁이가 이렇게 많았다니….'

색다른 경험과 삶의 활력 찾아서
인생의 마지막 꽃을 피우고 싶어

60세 이상 실버 패션 리더70명
제10회 실버패션쇼 예선 도전장

최종 30명 선발 두 달간 특별 훈련
선배 모델과 '찬란한 무대' 꿈꿔


나를 다독이며 속으로 외쳐본다. '할 수 있다!' 다섯 살배기 대박이도 해내는 일, 산전수전 다 겪은 내가 못해 낼 리 없으니.

19일 오전 사회복지법인 청전 노인생활체험관 교육지원센터. 이날 열린 '위풍당당! 실버들의 화려한 외출 제10회 실버패션쇼 예선전'엔 부산지역 60세 이상 실버 패션 리더 70명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선전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참가자 대기실은 이미 팽팽한 긴장감으로 터질 듯하다. 드디어 심사위원 6명 앞에 서는 운명의 시간. 참가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델처럼 당당하게 워킹을 한 후, 한껏 도발적인 눈빛을 하고 허리에 손을 얹고 꼿꼿이 섰다.

■내가 무대에 서고 싶은 이유

"평상시 옷맵시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아이들 키우느라 내 삶이 없었는데 막내까지 대학을 졸업했으니, 이제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지난해 패션쇼에 참가했던 친구가 색다른 경험 덕에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며 지원을 권했다" "민요, 장구 등을 배우다 보니 사는 게 점점 재미있어져 패션쇼까지 도전하게 됐다"…. 지원자 수 만큼이나 참가 동기도 다양하다.

청회색 상의, 진분홍색 넥타이, 밤색 베레모를 쓴 김우곤(79·해운대구 중동) 씨는 "아내와 딸, 며느리가 함께 고심해서 고르고, 거금을 투자한 '추석 선물'을 입고 왔다"고 했다. 58세 때 평생 컴플렉스였던 영어 공부를 기초부터 시작해 70세에 한국방송통신대 영문학과에 최고령 입학한 후 최고령 졸업까지 한 그는 복지관 영어 강사로 활동 중이다. 김 씨는 "손주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있고 최근에 노란띠를 땄다"며 "패션쇼 무대에서 모델로 인생의 마지막 꽃을 피우고 싶어 도전했다"고 말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온 김덕희(76·여·부산진구 전포동) 씨는 김우곤 씨와 남매다. 여동생 김 씨는 "오빠의 권유로 같이 신청하게 됐는데 선발이 돼 남매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통 민요를 배우고 있는 그는 '내 고향의 봄'을 만만찮은 솜씨로 선보였다.

김인엽(68·여) 씨는 실버패션쇼 예선전 재도전자다. 지난해 왜 선발되지 못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특기가 부족했던 탓인 듯해 지난 한 해 동안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댄스 스포츠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런 무대에 서 보는 게 꿈이었는 데 도전을 해야 꿈을 이룰 수 있을 테니 올해 또 한 번 도전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도전, 나를 살게 하는 힘

이제 특기를 선보이는 시간. 들끓는 열정을 다 내보이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심사위원 앞에 선 이들은 하모니카 연주를 하기도 하고, 시 낭송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배경 음악을 틀고, 구두를 벗고 맨발로 고전무용을 선보인 참가자도 있었다. 수준급 스포츠댄스와 성악가로도 손색없을 노래로 감동을 안기기도 했다.

심사위원의 질문이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좀 끼겠다"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고. 평소 실력만큼 노래가 안 되자 "진짜 무대에선 자신감 있게 더 잘 할 수 있다"고 읍소(?)도 하는 지원자들. 무대에 서고 싶다는 열정과 간절함이 이보다 더 뜨거울 수 없다.

누구 하나 선발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그들. 70명 지원자 중 무대에 오를 30명을 선정해야 하는 심사위원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2개월 훈련 후, 그들이 선보일 무대

심사위원들의 선정 기준은 네 가지. 패션(20점) 표정(20점) 워킹 및 포즈(30점) 스피치(적극성·30)다. 

아래 사진은 지난 1~9회 패션쇼 참가자 중 10회 무대 참가자 선발전을 기다리는 선배 모델들(오른쪽).
심사위원 김영옥(부산경상대 모델학과 교수) 씨는 "실버모델만이 가지는 그들만의 연륜 있는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는지를 봤고 워킹은 배우면 되니 하고자 하는 열정에 비중을 두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심사를 맡았던 정수정 노인생활체험관 교육지원센터장은 "올해는 예년에 비해 특기가 뛰어난 분이 많았고, 참가자의 열정이 너무 대단해 선발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선발된 실버모델들은 이달 말부터 매주 수·금요일 무대 연습에 돌입한다. 2개월 남짓 준비 기간을 거쳐 '실버패션쇼'를 선보이는 날은 11월 18일(오후 3~5시 부산디자인센터 6층 이벤트홀). 부산경상대 패션뷰티계열, 수원대 의류학과 학생들이 졸업작품을 의상 협찬한다.

정 센터장은 "시니어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지원하기 위해 실버패션쇼를 2007년부터 해마다 열어 왔다"며 "참가자중엔 패션쇼 덕분에 삶의 활기를 찾고 우울증에서 벗어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올해 10회를 맞는 실버패션쇼는 특별 무대도 마련했다. 특별무대는 지난 1회부터 9회까지 실버패션쇼에 출연했던 '선배 모델'의 무대로 꾸며진다. 예선전이 열리던 날. 이 무대 출연 신청을 한 선배 37명 중 20명을 선발하는 시간도 있었다. 10회 실버모델 30명과 지금까지 실버패션쇼를 거쳐 간 선배 모델 20명이 선보일 '자긍심으로 찬란한 무대'. 그들의 가을은 '인생의 두 번째 봄'이 될 준비를 시작했다. 강승아 선임기자 seu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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