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의 대화' 침팬지가 알려준 우정
침팬지와의 대화/로저 파우츠·스티븐 투켈 밀스
1967년 가을, 아동 심리학자를 꿈꾸던 대학원생 로저 파우츠는 두 살배기 소녀 워쇼를 처음 만난다. 기저귀를 갈고, 옷을 입히고, 같이 놀아주며 수화를 가르치는 게 그가 맡은 일이다. 처음 만난 날, 로저가 이유식을 준비하는데 워쇼가 장난스럽게 손짓을 한다. 잠깐 등을 돌린 사이 그녀는 순식간에 유아 의자를 빠져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마구 꺼내 침대로 달아난다. '새 오빠'를 위해 워쇼가 혹독한 신고식을 선물한 것이다. 키 76㎝에 몸무게 11㎏. 여느 아이와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워쇼는 로저의 인생에 운명적으로 찾아온 '침팬지'다.
<침팬지와의 대화>는 무명의 젊은 심리학자였던 저자가 30년간 침팬지를 연구하며 세계적인 과학자로, 나아가 동물 권익 운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로저는 결혼과 함께 아이를 갖게 되자 생계를 위해 우연히 조교 자리가 있는 '실험 심리학'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다. 조교로서 맡은 일은 가드너 부부 교수가 키우는 침팬지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입이 아닌 손으로 말하는 '수화'다.
저자, 30년간 침팬지 연구 몰두
인간·동물 '동등한 존재' 깨달음
생물 의학 실험 반대운동 앞장
'침팬지 센터' 만들며 공존 노력
강렬한 첫 만남 이후 워쇼와의 생활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워쇼는 주어와 동사, 수식어까지 수화로 배우더니, 6하 원칙의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더해 수화로 혼잣말을 하고, 인형에게 말을 걸고, 나무 꼭대기에 올라 주변 상황을 보고하기도 한다. 결코 훈련받지 않은, 그러나 인간 아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행동들을 보여 준다. 인간이 처음 달에 착륙한 1969년, 가드너 부부는 '사이언스'에 워쇼의 언어 발달에 관한 역사적인 논문을 발표한다. 이 연구에 대해 런던의 '타임스'는 '천문학에서의 천체 착륙처럼, 생물학에서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보도한다.
사실, 아프리카인들에게 침팬지의 이런 행동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서아프리카 열대 우림 부족들은 이웃에 사는 침팬지를 인간의 조상이나 형제처럼 여긴다. '침팬지'란 말도 '가짜 인간'이란 뜻의 콩고 방언에서 유래했다. 침팬지가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하고 지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과학계에서 뒤늦게 인정받은 건, 서구 근대의 시각에서 아프리카인의 믿음을 미개한 신화라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워쇼와의 동행을 이어가던 저자는 어느새 침팬지를 실험 대상이 아닌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여기기에 이른다. 몇 년 뒤 오클라호마대학교 영장류연구소로 떠나는 워쇼를 따라 로저의 온 가족이 이사를 하고, 연구소의 '비인간적인' 시설에 반발해 총책임자인 레먼 교수와 맞서기도 한다. 아이비리그 예일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직을 제안했을 때도,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의 영장류 연구 시설을 둘러보곤 학문적 성공의 기회를 걷어차 버린다.
지난 30년은 저자에겐 성장기지만 침팬지 입장에선 생존의 기록이다. 저자는 워쇼를 비롯한 침팬지들과 남다른 유대관계를 쌓으며 실험실 동물의 권익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60년대 침팬지는 유인 우주여행에 앞서 사전 실험용으로 사용됐다. 세계 최초의 우주인은 명성을 누렸지만 그보다 앞서 우주세계를 본 침팬지들은 그러지 못했다. 동물원에서 죽음을 맞거나, 의학 연구실로 보내져 죽음에 이르는 실험을 당했다. 워쇼 역시 아프리카 포획꾼에게 잡혀 와 미 공군 실험실로 보내졌지만, 운좋게 수화 연구 실험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운명이 바뀐 경우다. 대부분의 침팬지는 에이즈 같은 감염병 연구나 화장품·신약의 생체 실험 대상으로 이용된 뒤 버려진다.
침팬지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는 저자 로저 파우츠. 열린책들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