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뗑깡'은 몹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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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1341만 명이 본 영화 '베테랑'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이 이렇게 외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

하지만, '가오(かお ·顔)'는 '얼굴, 체면'을 가리키는 일본말. 광복 7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렇게 일본말이 펄펄 살아 날뛴다. 예전에 널리 쓰이던 '가오마담'이 이제는 '얼굴마담'으로 거의 정착했으니, 그나마 속없이 일본말 쓰던 버릇이 많이 나아졌다고 해야 할까.

'아작아작 크고 작은 두 마리의 염소가 캬베스를 먹고 있다/똑똑 걸음과 울음소리가 더 재미있다…'

김종삼의 시 '장편(掌篇)·1' 앞부분인데, 여기 나온 '캬베스' 역시 일본말 찌꺼기다. 양배추(cabbage)를 일본말로 'キャベツ'라 쓰는데, 한글로 표기하자면 '캬베쯔'쯤 된다. 뭐, 어떤 어르신은 '캬배추'라고도 하더라마는….

이미 우리 국어사전에 터 잡은 '십팔번(→단골 노래(장기)), 몸뻬(→일 바지)' 같은 말에 비하면 '가오'나 '캬베스'는 아예 쓰지 않아야 할 말이다. 일본말 찌꺼기에 왜 그런 등급이 있나 싶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를테면 '대통령, 철학, 구두, 가마니' 같은 말이야 이미 우리말이 되었으니 굳이 고칠 필요가 없겠고, '노임(→품삯), 맥고모자(→밀짚모자), 흑판(→칠판)'은 고쳐 쓰면 좋겠고, '소데나시(→민소매), 소라색(→하늘색), 땡땡이가라(→물방울 무늬)' 같은 말은 아예 버려야 할 터. 얼마나 우리말에 녹아들었느냐에 따라 처지가 갈리는 셈이다.

지난주에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인준안이 부결되자 국민의당을 향해 "뗑깡 부리고, 골목대장질 하고, 캐스팅보터나 하는 몰염치한 집단"이라고 비난했던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식사과를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한데, 추 대표가 정작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뗑깡'도 쓰지 말아야 할 일본말 찌꺼기인데, 일본에서 '텐깡(てんかん·癲癎)'은, 우리나라에선 '뇌전증(腦電症)'으로 이름이 바뀐 '간질(癎疾)'을 가리킨다. 그러니 뇌전증 환자와 가족에게 저런 표현을 쓴 잘못을 빌어야 할 터.

게다가 '자부동(방석), 가이당(계단), 단스(장롱)' 따위가 이젠 주변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저런 일본말 쓰는 사람과 함께 거의 사멸해 가던 말을, 굳이, 무덤 속에서 꺼낸 잘못 또한 깊이 사과해야 할 일이겠다. '생떼, 억지, 몽니'면 충분했을 것을….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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