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골목의 기도
/강은교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요즈음 재정비가 되고 있는 도시에선 많은 골목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골목이야말로 우리 삶의 짙은 냄새가 배어 있는 곳이 아닐까. 골목에는 아침이면 골목을 돌아나가시던 아버지의 냄새가 배어 있다. 무거운 시장 가방을 들고 땀을 닦으며 들어오시던 어머니의 냄새도. 첨 신은 구두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던 형 또는 첨 맞춰 입은 분홍빛 코트 자락을 조심히 만지며 대문을 수줍게 두드리던 언니의 냄새도. 언니는 그때 첫사랑을 하는 중이었을까.
고교 시절에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돌면 늘 한복을 단정하게 입으신 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 계시곤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올 딸을 기다리며. 아버지의 등 뒤로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등 뒤에 펼쳐져 있던 하늘은 왜 그리 잿빛으로 보였으며 끝없는 것으로 보였으며 아버지가 그리로 사라지실 것 같은 심연으로 보였을까.
아버지 등 뒤로 하늘이 펼쳐진 곳
큰길에 기죽지 않고 되레 품어 안는
'아주아주 작은 창'이 있는 그 장소
우리의 삶 향기가 밴 골목이 그립다
그 이미지는 나도 모르게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나의 시에 '만리 하늘' '가장 깨끗한 하늘'이라는 시구로 되살아났으며, '사랑법'이라는 시에는 '가장 큰 하늘은 너의 등 뒤에 있다'는 시구로 되살아났다. 언제던가 그 동네로 다시 갔더니, 그 골목은 그대로 있었으나, 아버지가 서 계시던 대문과 하늘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나의 마음도 이미 그때의 '깨끗한 만리 하늘'을 보는 마음은 아니었다. 세월에 많이 이지러져 있었다고나 할까.
얼마 전의 여행에서 만났던 크로아티아의 시장 골목도 잊지 못하겠다. 대체로 옛 건물이 많은 유럽엔 돌길 골목이 많지만 크로아티아의 그 골목은 유난히 좁고 깊은, 마음을 끄는 골목이었다. 셔츠에서부터 몸뻬 같은 바지, 가방, 모자, 스카프, 온갖 잡화가 잡다하게 걸린, 그러나 거기서 사 먹은 아이스크림은 얼마나 맛이 있던지, 바로 사람들의 삶의 고물이 속에 들어 있는 아이스크림이었던 모양이다.
런던에서 걸어 본,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걸어 다녔을 블룸즈버리 골목길도 인상적인 길이었다. 거기엔 블룸즈버리 커피하우스도 있었다. 런던교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나오는 다리이다. 1930년대의 런던의 다리였으니, 엘리엇도 아마 집앞 골목길을 나와 그 다리를 걸으며 그의 대표작 '황무지'에 나오는 '저렇게 많은 죽음이 있었다니…'라는 시구를, 또 어느 날 아침엔 '프루프록의 연가'에서 노래했듯이 '고양이가 굴뚝을 넘어 다니는'이라는 시구를 중얼거리며 그 다리를 건너 그 시절 근무하던 로이드은행으로 출근했을 것이다. 그는 성실한 은행직원이었으니까. 아마 모더니즘 작가 제임스 조이스도 골목을 나와 그 다리를 걸었겠지.
하긴 나도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 나타나듯이 런던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그녀처럼 어린 시절엔 '동네 걷기'를 많이 했다. 동생들의 손을 잡고, 동네의 모르는 골목골목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층집 열린 창의 커튼이 휘날리는 골목은 그 예쁜 커튼 때문에 들어가 보았고, 방앗간 골목은 그 고소한 냄새 때문에 들어가 보곤 했다. 어느 골목엔 유명한 시인의 집이 있다고 해서 들어가 보았으며….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그만 언덕을 넘어가 버렸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 있었다. 어찌어찌 겁에 질린 동생들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날 저녁 어린 동생들을 잘못 보살폈다는 '죄'로 집을 쫓겨나, 한참 동안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지난겨울에서부터 봄까지 경험했던 '광장'도 실은 골목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골목의 촛불이 광장의 촛불들로 이어진 것이었다. 생각을 더 펼쳐 가 본다. 삼단논법으로 써 보기도 한다. '골목은 촛불이다, 촛불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골목은 기도이다'라고.
깊은 골목이 그리워진다. 가족이 있는, 기도가 있는, '아주아주 작은 창'이 있는, 마음의 깊디깊은 골목, 거기 세상을 품어 안는, 어떤 큰길에도 기죽지 않으며 오히려 그 큰길들을 품어 안는, 인간이 시작되는 골목, 내가 최근의 나의 시에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아 숨막히는 삶//'이라고 썼던 그런 삶이 시작되는 마음의 골목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