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갖은 고생'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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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서럽다 뉘 말하는가/흐르는 강물을/꿈이라 뉘 말하는가/되살아오는 세월을/….'

이한열 열사 추모곡으로 널리 불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노랫말인데, 저기 나온 '서럽다'는 '섧다'로 줄여 써도 된다. '한 가지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 몇 가지가 널리 쓰이며 표준어 규정에 맞으면, 그 모두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표준어 규정(제26항)에 따른 것. 우리말 어휘를 풍부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규정이다. 이 규정에 따라 '돼지감자/뚱딴지, 마파람/앞바람, 모내기/모심기, 버들강아지/버들개지, 엿기름/엿길금, 우레/천둥' 따위가 복수 표준어 지위를 얻었다.

한데,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묘한 게 눈에 띈다.

*섧다: [활용 정보: 설워, 설우니, 섧고, 섧지] =서럽다.(갈 곳 없는 내 처지가 너무도 섧다./안 다친 데 없이 죄 뜯긴 수난녀는 너무도 섧고 너무도 분했다.<오유권, 대지의 학대>…)

여기서 앞부분에 나온 '설워, 설우니, 섧고, 섧지'라는 활용 정보가 바로 그것인데 '설워, 설우니'와 '섧고, 섧지' 활용꼴이 다르다. 무슨 이유일까.

사실, 여기엔 원칙이 있다. 어간 '섧-'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 만나면 '설우-' 꼴이 되는 것. 어간 받침 'ㅂ'이 '우'로 바뀌는 것인데, 이런 꼴바꿈은 어간말자음군 'ㄼ'의 'ㅂ'이 연철되던 고어의 흔적(ㅂ>ㅸ>반모음 w)이다.(이런 활용은 '넓다/짧다'의 어간말자음군 'ㄼ'의 활용과도 구별된다. 이 말들은 '널워, 널우니/짤와, 짤우니'가 아니라 '넓어, 넓으니/짧아, 짧으니'로 활용한다.)

이와 비슷하게 활용에 신경 써야 할 말로는 '갖다, 머물다, 서둘다, 서툴다'가 있다. '가지다, 머무르다, 서두르다, 서투르다'의 준말인 이 무리에는 아예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연결되지 않는다. 즉, '갖아, 갖아라, 갖은/머물어, 머물어라, 머물은/서둘어, 서둘어라, 서둘은/서툴어, 서툴은' 꼴로 활용하지 않는다. '많이 갖은 사람'으로 쓰면 잘못이라는 것.(다만, 이 '가지다'의 활용꼴 '갖은'은 잘못이지만, '갖은 고생, 갖은 노력'에 쓰인 관형사 '갖은'은 틀린 게 아니니 헷갈리지 말 것.)

이때는 '가져, 가져라, 가진/머물러, 머물러라, 머무른/서둘러, 서둘러라, 서두른/서툴러, 서투른'처럼 본딧말 어간으로 바꿔 줘야 한다.

준말의 활용을 제한해 본딧말로 쓰라는 것은, 혹시,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얘기일까.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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