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의 기억, 전쟁에서 꽃핀 문화] 2. 예술이 흐르는 거리 ② 동광동·대청동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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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40계단, 김종식 아틀리에… 골목 곳곳 예술의 흔적

부산 중구 동광동·대청동 거리 곳곳엔 피란민의 애환과 함께 예술혼 역시 진하게 배였다. 사진은 일제 강점기 만들어졌던 원래 40계단 자리.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혼은 꾸준히 이어졌다.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부산 중구 40계단을 중심으로 한 동광동·대청동 일대도 마찬가지다. 김형균 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장을 비롯해 오재환 부발연 경영사회연구실장,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 차재근 문화소통단체 숨 대표, 손민수 부산여행특공대 이사, 박상필 부발연 연구위원과 함께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40계단 지금과 달리
현 '유진봉투' 건물 자리

이중섭도 한때 동광동 거처
계단서 은박지 그림 몰두

■'40계단' 위에서 꽃핀 예술혼

일제강점기 해안가를 매립하고 복병산 일부를 깎아 주택지를 만들면서 형성된 동광동 40계단. 국민은행 중앙동지점에서부터 40계단을 거쳐 40계단문화관 등에 이르는 450m가량의 거리는 '40계단문화관광테마거리'로 지정돼 국내외 관광객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고(故) 김종욱((1949~2015) 대중음악연구가가 <부산의 대중음악>에서 밝혔듯 40계단을 다룬 대중가요도 제법 된다. 손인호의 '함경도 사나이', 박재홍의 '경상도 아가씨', 한정무의 '그대는 바람과 같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원래 40계단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다. 전쟁 직후인 1953년 11월 27일 부산 중구 일대를 비롯한 부산역까지 전소한 대화재로 기존 도로까지 사라지면서 40계단 역시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됐다. 지금의 40계단에서 40m 떨어진 자리(현 유진봉투 건물) 자리가 원래 40계단 자리다. 김한근 소장은 "판자촌 일대가 화마에 휩쓸리면서 피란민들은 또다시 눈물을 삼켰다. 대화재 이후 우체국이 앞 블록으로 이동하고 새 도로가 생기면서 40계단도 옮겨졌다"고 말했다.

40계단은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밴 곳이지만, 동시에 예술의 흔적도 담겨 있다. 중구 토박이로 동광동 동장까지 지낸 이영근(87) 옹은 40계단에서 만난 이중섭 화가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나 이웃이자 적이 됐던 엄혹한 시절, 40계단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이중섭 화가는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금수현 선생에게 음악을 배우던 이 옹과 이 화가의 인연은 실로 우연이었다. 종이가 없어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던 이 화가가 40계단 근처를 지나던 이 옹에게 담배 은박지를 달라고 부탁했던 것. 이 옹은 "오가며 마주치다 몇 번 은박지를 구해주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여버린 작업실

폐가가 되면서 황폐하게 변해버린 부산 1세대 화가 김종식의 자택.
1세대 화가 김종식 작업실
수십년 폐가로 방치돼 아쉬움

외관 남은 마지막 적산가옥
역사공간 보존 방안 찾아야

40계단을 뒤로 한 채 대청동 쪽으로 이동하며 골목을 거닐었다.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을 보고 있으려니 그 옛날 거리를 누볐던 예술인들과 피란민들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좁은 계단을 오르니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3층 규모의 낡은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장 김종식 기념관'이라는 팻말조차 담쟁이덩굴에 가려 보이지 않는 스산한 곳. 바로 부산의 1세대 화가이자 부산 근대 화가 중 거의 유일하게 자신만의 작업실을 확보한 고(故) 김종식(1918~1988) 화백의 기념관이었다. 1953년 부산역 대화재로 집과 화실이 불타면서 작품 상당수도 사라졌지만 같은 자리에 집을 짓고 1988년 세상을 뜰 때까지 줄곧 작품활동을 한 곳으로 알려졌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건축면적 80㎡ 규모의 작업실에서 김 화백은 대표작인 부산항 연작(1949~1956)을 비롯한 작품 대부분을 완성했다. 부산 최초의 지역 화가 모임인 '토벽회' 아지트로 전쟁을 이겨냈던 작업실은 1989년 김종식 화백 서거 1주기를 맞아 유족을 중심으로 '남장 김종식 기념관'으로 단장됐다.

하지만 이후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면서 30년 가까이 방치돼 있다. 실제로 부산항을 바라보고 있는 작업실 창문은 사라진 지 오래된 듯 보였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바닥은 발 디디기 힘들 만큼 낡은 상태였다. 피란수도 부산서 펼쳐졌던 지역 예술혼의 주요 장소는 그렇게 세월의 무게에 눌려 스러져가고 있었다. 부산 중구에서 자택 매입 방안을 검토했지만 예산 확보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김형균 센터장은 "김 화백은 전쟁 당시뿐 아니라 부산 미술계에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역사적 문화 자산 가치에 지금이라도 눈을 돌려 시 차원에서 매입하고 구의 중요한 자산으로 관리하는 등의 적극적인 대처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1918년 부산 장전동에서 태어난 김종식 화백은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예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1942년 귀국해 교편을 잡았다. 전쟁 전후 시기엔 노점상과 판자촌, 귀환동포 등 힘겨운 삶을 담아낸 그림을 그리는 등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이중섭 화백의 흔적 곳곳에
외관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적산가옥인 다테이시 가옥.
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골목을 따라 걸으니 고풍스러운 저택이 나왔다. 차재근 대표가 2012년부터 예술인들의 창작 레지던시 공간 '복병산 창작여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저택으로,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업가 다테이시 요시오가 소유했던 적산가옥이라고 해 일명 '다테이시 가옥'으로 불린다.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오래된 집이지만, 외관은 과거 흔적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산업화와 함께 급작스러운 현대화로 적산가옥이 채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감안하면 다테이시 가옥은 충분히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비슷한 형태의 적산 가옥들이 이미 개발되고, 가옥 맞은편에 있던 한 적산가옥마저 지난해 빌라촌으로 바뀌면서 미래가 불투명하다. 현재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소유하고 있지만 언제 민간 소유로 전환될지 모른다. 차재근 대표는 "부지가 300평에 이르는 이곳은 잊지 말아야 할 역사다. 시 차원에서 매입하는 등 지금부터라도 보존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지척엔 이중섭(1916~1956) 화가가 머물렀던 집도 있었다. 근대부산도자업체의 메카인 대한도기에서 일하기도 했던 이중섭은 부산 동구 범일동뿐 아니라 부산 중구 대청동에도 거처를 마련했다. 화가가 직접 남긴 편지봉투에 주소가 온전히 남아있어 찾을 수 있게 됐다. 머물렀던 당시 집 외관은 이미 사라졌지만 이중섭 화가가 머무르며 40계단을 오간 거리는 분명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부산 동구 범일동에 '이중섭 거리'와 '이중섭 전망대'가 조성된 것처럼 이 일대 역시 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김한근 소장은 "이 화가의 활동 공간이 광복동 일대여서 광복동 주변에도 집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지난해 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전에서 공개된 봉투를 보고 찾아나섰다"며 "김종식 화백 기념관, 다테이시 가옥에 이어 이중섭 집에 이르기까지 기존 40계단의 의미를 대청로 뒷길로 넓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글·사진=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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