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원의 시네아트] 엘리자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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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성애 통해 루마니아 사회의 구조적 모순 벗겨내다

영화 '엘리자의 내일'은 중년 남성이 딸의 미래를 위해 부패한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담아낸다.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우린 때론 현실을 영화처럼 받아들이기도 하고 영화를 통해 현실의 단면을 자각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영화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는 인과관계의 밀도라고 느낀다. 이야기의 세계는 입구와 출구가 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을 제시한다. 원인을 찾고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이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이라 해도 좋겠다.

부패한 현실과 마주한 중년 남성
딸 성적 조작 나서며 '불의와 타협'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사안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문제를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원인들이 엮여 만들어낸 현재, 실타래처럼 뒤엉킨 인과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이를 단순화 시켜 끝내 해결한다. 하지만 가끔 현실의 덩어리를 그대로 잘라낸 것 같은 밀도를 유지하는 영화도 있다. '엘리자의 내일'도 그중 하나다.

루마니아의 의사 로메오(안드리안 티티에니)는 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라구스)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려 애쓴다. 원하는 학교에 가려면 졸업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지만 불행히도 엘리자는 시험 전날 낯선 남자에게 폭행을 당한다.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충격으로 제대로 시험을 칠 수 없었던 엘리자를 위해 로메오는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해 조작하려 한다. 의사라는 지위와 인맥을 통해 청탁하려는 남자 앞에 원칙을 지키려는 아내와 딸이 서 있다.

표면적으로는 부성애라는 명목 하에 불의마저 감수하는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아빠와 딸 사이의 갈등을 다룬 세대 간 드라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루마니아 사회의 예민한 속살이다.

누구나 불행 앞에 한 번쯤 반문해볼 수 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차적으로는 딸이 폭행을 당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로메오의 대응을 보고 있으면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꿈꿨던 로메오는 실패한 혁명에 좌절하고 조국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그는 딸이라도 이곳을 탈출해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그의 최선이 젊은 날 스스로 혐오했던 부패와 부정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엘리자의 내일'은 개인의 윤리적인 선택에 빗대어 루마니아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한 껍질씩 벗겨낸다. 뇌물을 먹이고 편법을 쓰는 일이 숨 쉬는 것처럼 만연한 사회에서 그 길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로메오처럼 탈출을 선택할 수도 있고,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처럼 타락한 세상을 받아들이고 불의에 눈 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의 내일'은 다른 길을 모색한다. 비록 최선은 아닐망정 차악 정도는 선택할 양심.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소시민들의 소극적인 저항이야말로 세상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첫걸음이다. 아직은 너무 멀어 보이지 않을지언정 이 땅의 엘리자'들'를 위한 내일 역시 그렇게 찾아올 거라 믿는다. 10일 개봉.

송경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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