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찾은 길] 한국회화 진로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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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회화소사/이동주

1976년 봄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향원정 동쪽 현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이던 시절, 회화전시실에서 그림을 진지하게 오래 보시는 기품 있는 한 노신사를 뵙게 되었다. 당시 60세인 이동주(1917~1997년) 선생으로 통일원 장관을 역임했고 정치외교 전공교수로, <한국회화소사>(1972년)와 <우리나라의 옛 그림> 등 회화사 저술을 여럿 남긴 분이다. 하지만 정식으로 인사드린 것은 몇 개월 후 혜화동에 위치한 선생 자택에서였다. 한일 국교정상화 10주년 기념으로 일본 3개 도시에서 성황리에 열린 '한국미술 5천년'의 귀국전 종료 후 전시에 출품된 선생 소장인 김홍도의 '만월대계회도' 반환 때였다. 이를 계기로 멘토이자, 타계하실 때까지 20년간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옛 그림에 관한 이렇다 할 저술이 없던 시절인 1972년 출간된 <한국회화소사>는 문고본 소책자였다. '역사로서는 그림 그 자체가 표시하는 그림의 미와 그 그림의 미에 대한 그 시대의 기준을 중심'으로 서술한 이 책은 광복 이후 최초의 한국회화사 교과서였다. 10년 뒤 수정판이 나왔고, 1996년 판형과 출판사를 달리해 다시 간행되었다. 1973년 대학교 동아리스터디를 위해 동대문과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 문고본을 6권이나 싹쓸이한 기억이 새롭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1989~1981년)의 아들인 이동주는 2017년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다. 본명은 이용희로 미술사 관련 글은 동주(東洲)란 필명으로 발표했다. 같은 민족대표를 지난 세기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예가이며 언론인인 오세창(1864-1953) 아래서 조선시대 전통적인 회화사 품평과 감상으로 그 법통을 이었다. 우리 옛 그림 연구의 학문적 성과는 그분의 전공분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혹자는 그의 미술사연구를 딜레탕트로 보기도 하나, 전통적인 방법론에 근대적 미술사학 도입 이전 시기 간행된 서양의 미학과 미술사 서적을 두루 아우르며 자성일가를 이룩했다. 이 책을 읽고 조선시대 회화사를 선택했고, 박물관 생활 42년째인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 책이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원복

부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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