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르퓌길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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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전후 프랑스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 불린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이다. 19세 때 발표한 <슬픔이여, 안녕>은 지구 반대쪽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였는데 중학생 때 읽어 보니 남녀노소가 얽히고설킨 기괴한 사랑 이야기라 중간쯤 읽다가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 그만 덮었다. 마약 복용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자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했다는데, 너무 그럴듯해 예순 들어 다시 사강 전집을 빌려다가 읽어 보았지만 역시 골치가 아팠다. 한국에서 섣부르게 그 내용을 따라 했다가는 천하의 사이코로 낙인찍혀 영영 세상에서 생매장될 게 틀림없다. 그저 책 제목이 멋있어 그 속내는 덮은 채 이리저리 말들 하는데, 우리가 아는 소위 '프랑스적인 것'은 빵집 이름부터 시작해 대개가 그러하다. 대학 불문과는 다 없애면서 불어만 흘러넘치는 한국은 사강만큼이나 기이한 나라다.

그녀 고향은 프랑스 남서부 카자르크다. 오베르뉴 고원을 넘어 피레네 산맥으로 통하는 길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로 절벽에 에워싸인 강가 풍경이 아름답다. 퇴직 기념 삼아 부부가 무작정 걸어 볼 요량으로 요즘 도보꾼들의 로망인 스페인 카미노를 인터넷에서 뒤지다가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해 대신 선택한 길이 바로 카자르크를 통과하는 옛 순례길이었다. 프랑스 정부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마을이 줄지어 선 이 길이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인 GR 65, 속칭 르퓌길이다.

780킬로의 르퓌~생장 옛 순례길
알프스와 중세 마을 풍광 만끽
눈 덮인 피레네 지금도 잊지 못해


십자군 원정의 집결지였다는 르퓌에서 카미노의 출발지인 생장까지는 모두 780킬로로, 부산 이기대서 강원도 고성까지 걷는 해파랑길과 길이가 꼭 같다.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산티아고까지 걷는 유럽 사람들이 거쳐 가는 길로 우랄산맥 이쪽 사람은 요즘 시골에서 갓난아기 보듯 드물다. 실제 서른 하고도 하룻길에 동양인은 일본인 하시다 상과 똥띵이 대만 아지매 하나밖에 못 봤고, 숙소의 프랑스인들이 이 초라한 한국노인 보고 기념촬영하자고 덤빌 정도다. 조국을 사랑하면서도 그악스러운 동포들에게 데어 멀미가 난 허무주의자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될 게라 자신한다.

삼천리 금수강산도 아름다운데 왜 비싼 돈 들여 멀리 가느냐는 질책에는 할 말이 없다. 요즘 죽어 저승 가면 염라대왕도 "어느 나라 갔다 왔노" 하지 않고 "독도 가 봤냐"고 묻는다지 않는가. 하지만 확신한다. 오색 들꽃 핀 스위스의 산록을 그렇게 흠모하고 입이 닳도록 서양 중세 마을의 풍광을 예찬하던 분도 이 길을 한 달쯤 걷고 나면 그 아름다움에 신물이 나서 죽을 때까지 알프스와 고딕 성당을 꿈에 볼까 겁내실 거라는 점을. 또한 중세는 정말 허접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진실을 며칠 주무셔 보면 금세 터득하게 된다. 사실 열흘짜리 패키지여행보다 돈도 적게 들었다.

맘은 솔깃하지만 불어를 모르는데 밥과 잠자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솔직히 난 불어를 전공한 아내 덕에 벙어리로 한 달을 잘 견뎠거니와, 하시다 상의 경우 불어는 물론 영어도 모르는 터에 오직 눈치와 가이드북만 갖고도 배불리 먹고 편히 잘 자는 걸 두 눈으로 보았으니 안심하셔도 좋다. 물론 '먹는 물'이라는 불어를 몰라 염소가 마시는 물을 벌컥벌컥 음용하는 걸 보긴 했지만. 게다가 서양 길동무들은 행여 이 에트랑제가 외로울까 봐 "봉주르!"를 저마다 외치는 바람에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딸보고 나도 "봉주르!"했지 뭔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냐고? 이 나이 되도록 제정신 하나 못 차리는 주제에 그 무슨 느림의 철학 따위를 얻었겠는가. 어느 순례자가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나의 본질을 보노라"라고 돌에 새긴 걸 봤지만, 행여 길 놓쳐 이역만리에서 객사할까 아내 뒤만 쫓아가는 처지에 고독과 침묵도 다 편한 소리였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진리가 제집 안방에서만 큰소리치던 서생이 깨달은 전부였지만, 아아! 스물둘째 날 곰 발바닥 지친 몸으로 언덕을 넘으니 아스라이 멀리 펼쳐지던 눈 덮인 피레네를 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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