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건축 이야기] 23. 부산 서구 암남동 '송도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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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린 공간… 창문 넘어 어릴 적 바다를 보다

"건축은 갑자기 솟아오르는 게 아닙니다. 기존에 내포돼 있는 것들을 잘 다듬는 행위이죠. 송도가 편안한 해변 휴양지로 진화했으면 좋겠다"는 이기철 소장의 송도주택. 사진은 떠 있는 콘셉트의 송도주택 거실. 건축사진작가 윤준환 제공

최고의 피서지와 신혼여행지로 인기를 끌었던 부산 송도 해수욕장. 케이블카를 배경으로 가족 흑백사진들을 찍은 아련한 기억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산업화 시대를 맞아 송도 역시 아련한 '기억들'을 순식간에 '고물'로 만들어 놓고는, 늘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를 반복하는 현장이다. 70~80년대 난개발 속에 불량 상업시설이 난무하고, 인근에는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산업과 발전의 논리로 물상화돼 버린 도시의 풍경을 우리는 그저 텔레비전 속의 한 장면인 양 무심히 넘겨버린다. 하지만 건축적 상상력과 인간이 거주하는 '존재의 집'을 꿈꾸는 건축가라면, 이러한 현상을 무심하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과거 송도 지역성·기억을 형상화
건물 내·외부에 계단만 무려 8개
유년기 골목길의 추억 되살아나

다양한 재료로 다양한 질감 연출해
동선의 방향성 제시·공간 차별화

미국 버클리대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온 젊은 건축가 아키텍 케이 이기철 소장은 그의 첫 야심작인 '송도주택'에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다. 과거 송도의 지역성과 기억을 불어넣는 것이다. 상업시설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산업을 하는 건축주와 함께 저층형 단독주택을 제안한다. 자수성가한 건축주는 어릴 적, 부산 서구 동대신동 단독주택들을 막연히 동경했다고 한다. 그 소망은 결국 이뤄졌다. 또 건축주가 한참 사업을 일구는 시기에 그가 오르락내리락했던 남부민동 계단의 수직적 상승 이미지를 제안했다. 이 소장의 콘셉트와 맞아 떨어졌다. 

외부 측면 전경.
이 소장은 부산의 구불구불한 도시구조를 집안에 오롯이 담았다. 집안 공간을 우선 배치한 다음에 동선을 설정했다. 이리저리 흐르는 동선을 따라 공간감을 즐기게 했다. 내·외부 8개에 이르는 계단을 포함한 동선은 집안을 돌아다니는 경우의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않는 부지런한 건축주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창밖으로 조망하는 송도 바다의 새로운 경치를 경험한다.

실내에는 떠 있는 공간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공간이 아닌, 비일상적인 공간을 연출하려는 건축가 전략이다. 이 소장은 "우리는 지극히 표준화된 것에 반응하고 있어요. 비일상적인 공간을 경험하면 고정화된 공간에서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소장은 "건축주는 청·장년 시절 사업을 하면서 땀을 흘린 송도 바다와 불규칙하게 얽혀진 골목의 기억을 기분 좋게 회상했습니다. 단순한 형태의 외부와 달리, 내부는 다양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라고 강조한다. 이 소장의 배려는 한 풍경에서 다른 풍경으로 차츰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구석구석들을 기분 좋게 경험하게 한다. 
캐나다 건축 엑스포에서 수상한 의자.
송도의 매력은 구불구불한 산세에 맞춰 오밀조밀 자리 잡은 작은 집들에 있다. 골목 사이사이로 갑자기 나타나는 바다는 부산 바다 풍경의 매력이다. 이 소장은 여기에서 송도의 저층형 단독주택지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오래된 땅과 주택들을 리모델링해 저층 주택으로 만들면 유럽의 니스, 몬테카를로 같은 휴양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횟집 같은 상업시설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지도 과제다. 현재 상업시설 대부분이 지적불부합지(땅 실제 크기와 공부상의 크기 차이)여서 상인들은 신축을 하기 꺼린다. 정부 및 지자체가 공공성의 차원에서 기존 재산권을 인정하면 상업시설들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송도주택은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희망의 작은 출발이다. 실제로 송도주택 완공 후 주변에 비슷한 프로그램을 담은 단독주택들이 몇 채씩 지어지고 있다. 
송도 주택의 외부 전경. 건축사진작가 윤준환 제공
이 소장이 건축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공간에 대한 천착이다. 그다음으로 재료 물성에 따른 다양한 질감의 연출에 주목한다. 송도주택에서는 노출 콘크리트, 대나무 거푸집 콘크리트에서부터 송판 콘크리트, 나무벽돌, 현무함 벽돌, 금속패널까지 다양한 재료들을 사용했다. 어떤 재료들은 동선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내부 메스와 다른 공간을 차별화시킨다. 그는 건축주를 위해 건축주 인체에 꼭맞는 독특한 스타일의 의자를 설계했다. 이 의자는 북미 지역 건축 엑스포인 '이덱스캐나다 우드숍'에서 최종 7명의 결승 진출자들에게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건축에서 꿈꾸는 것은 표준화가 아닌, 우연과 비대칭, 정지, 소통의 언어들이다. 이러한 '개인성의 자유'를 지닌 건축은 차츰차츰 축적돼 결국 주위 경관을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박태성 문화전문기자 pt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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