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發 백제行 시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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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부터 부여 궁남지는 단아하고 청초한 매력의 연꽃 향연이 펼쳐진다. 백련, 홍련 등 50여 종의 다양한 연꽃이 곱게 피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거나 장맛비가 쏟아지는 이 시기에 마땅한 여행지를 찾기는 사실 고역이다.

무더위를 잠시나마 피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러면서 도심을 떠나 고즈넉함을 만끽할 수 있는 곳.

단아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충남 부여로 향했다. 백제의 찬란했던 과거, 그 시간을 따라가 봤다.

무왕 '서동'이 선화공주를 위해
궁궐에 만들었다는 연못 궁남지
여름이면 붉고 하얀 연꽃의 향연

삼천궁녀 놓고 설 분분한 낙화암
정림사지 5층 석탑 있는 박물관
백제문화단지도 아이와 가볼 만

진흙탕에서 자라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학창시절을 잠시 떠올려 본다. 백제는 수도를 2번 옮겼다. 하남 위례성에서 시작해 웅진성(공주), 그리고 사비성(부여)으로 옮겼다.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아예 국호도 남부여로 바꿨다. 이런 이유로 부여와 바로 인근의 공주는 백제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지역 곳곳에서 과거 백제의 흔적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시간 속을 걷는 부여 여행의 첫 번째 장소는 궁남지(서동공원)로 택했다. 백제를 대표하는 장소 중 하나인 궁남지는 무왕 시대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가 찾은 이날은 마침 '부여서동연꽃축제'가 한창이었다. 이번 축제의 주제는 '연꽃애(愛) 빛과 향을 품다'였다. 10만여 평의 연못은 온통 붉고 하얀 연꽃의 향연이다. 사람 키보다 큰 연꽃이 즐비하다. 연꽃은 7월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부터 피어난다. 백련, 홍련, 수련꽃, 가시연꽃 등 50여 종의 다양한 꽃이 곱게 피어올라 보는 이들의 눈을 정화시킨다. 연꽃 축제가 부여군의 최대 축제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2015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대한민국 문화관광 우수축제로 선정된 연꽃축제에서는 연밥 인형 만들기, 연씨 팔찌 만들기, 천연염색 체험 등 재미있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연꽃 사이로 카약을 즐기고, 다정한 연인들은 연못 사이를 오가는 쪽배를 타고 오붓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30도를 넘는 무더위로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지만, 눈만은 시원했다. 온 사방에 펼쳐진 연꽃의 장관과 주위의 여유로움은 '먼 길 오길 잘했다'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그 잎과 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연꽃. 그래서 연꽃의 꽃말은 '순결, 청순'이고 '당신은 마음마저도 아름답습니다'이다.
백화정
잠시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백제 때 한 과부가 용의 아이를 낳았다. 서동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는 커서 신라의 선화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선화공주와 서동이 사랑하는 사이라는 동요를 지어 동네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4구체 향가라는 학창시절 단골 시험문제였던 '서동요'의 탄생이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을 하고, 후일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이 됐다. 서동은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이 궁남지에 인공연못을 만들고, 뱃놀이를 자주 즐겼다고 전해진다. 궁남지의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서동과 선화공주가 이곳을 즐겨 찾은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궁남지는 야경 명소로도 손색이 없다. 다리에 달려 있는 불빛이 못에 비치면서 환상적인 경관을 자랑한다. 연꽃의 고운 자태는 낮이든 밤이든 연인들에게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된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처럼 이곳은 지금도 '연인들의 사랑을 이어주는 곳'이라는 속설이 있다.

패망한 나라의 역사는 그렇게 왜곡된다
낙화암
부여에 가기 전까지는 미처 기억을 못했다. 낙화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인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낙화암이 너무 좁아서 삼천 궁녀가 머물 수도 없고, 떨어질 수도 없다. 아마도 거짓말 같다"는 말. 그 당시엔 피식 웃어넘겼던 것 같다. 국정교과서 역사책에는 삼천 궁녀가 떨어졌다는데….
부소산성 숲길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부소산성)은 부여 북쪽에 있는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이다. 부소는 소나무의 옛 이름. 걷는 내내 소나무 숲이 펼쳐진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햇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백마강(금강)이 보인다.
백마강
백제탑의 노을,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여름 백마강가의 아지랑이, 고란사의 고아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내리는 보슬비, 낙화암 곁에 앉아 우는 소쩍새, 백마강에 잠긴 달빛,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구드래 나루에 들어오는 돛단배. '부여의 8경'이라고 회자되는 비경이다. 이곳 부소산에서는 부여 8경을 다 누릴 수 있다. 뜨거운 햇볕을 가려 주는 숲길이라고 해도, 한여름에 부소산을 걷는다는 것은 힘들다. 정말 쉬엄쉬엄 걸어야 한다. 길이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부소산의 끝자락 즈음 드디어 삼천 궁녀가 꽃같이 떨어졌다는 낙화암에 다다른다. 누구나 아는 얘기이지만, 잠시 다시 역사 속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녀들을 데리고 향략을 일삼았다. 계백 장군은 황산벌에서 신라의 군사와 싸웠으나 패해 결국 백제는 멸망했다. 수많은 궁녀들은 흉악한 적군에게 굴욕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고 해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이를 두고 떨어지는 꽃이라 하여 낙화암이 된 슬픈 전설.

최근 한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가 낙화암을 두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됐다. "조선 후기 궁녀의 수가 약 500명인데, 조그만 백제에 무슨 삼천 궁녀가 있냐. 삼천 궁녀 이야기는 가짜 뉴스다. 3000명이 낙화암에 다 서 있지도 못한다"고 그는 일갈했다.

현장에서 직접 본 낙화암은, 과연 좁았다. 20여 명이 겨우 서 있을 정도. 지인의 말도, 유시민 작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삼천 궁녀는 중국 역사서에서 으레 수많은 궁녀를 지칭할 때 쓰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 세계(전 세계)도 같은 의미다. 패망한 나라의 역사는 그렇게 왜곡됐다.
정림사지 5층 석탑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제9호)이 보존돼 있는 정림사지 박물관과 사비궁, 백제 시대 민촌(民村)을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도 아이들을 데리고 한 번쯤 가 볼 만한 곳이다.

경주가 신라의 찬란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면, 부여는 백제의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다. 청아하고 단아한 연꽃은 왠지 백제를 닮았다.

글·사진=최세헌 기자 cornie@busan.com

여행팁

■교통편

부산에서 충남 부여까지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4시간이 걸린다. 부여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대전복합터미널까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3시간 소요. 요금은 성인기준 2만 3300원.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대전서부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부여시외버스터미널까지 30분 간격으로 시외버스가 운행한다. 시간은 1시간 30분 소요. 요금은 7100원. 부여는 기차역이 없다. 철도를 이용할 경우 대전역에 내린 뒤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먹거리
부여는 도시 규모에 비해 의외로 맛집이 많다. 모 TV프로그램에 '3대 천왕'으로 소개된 '시골통닭'은 프라이드 치킨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바삭한 튀김은 과자를 먹는 듯 하고, 살코기는 기름기도 많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줄 서서 먹는 '장원막국수'는 쫄깃쫄깃하고 탱탱한 면발과 독특한 육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여의 대표 음식을 꼽자면 연잎밥이다. 그중에서도 '솔내음'의 '연잎밥과 떡갈비'(사진)는 빼놓을 수 없다. 향긋한 연잎과 어우러진 연근, 단호박, 대추, 자색고구마 등은 마치 하나인 듯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먹는 내내 연잎향이 감도는 밥은 찰지고 쫀득하다. 한돈과 한우 떡갈비는 육즙이 살아 있다. 느끼하지도 않고 중간중간 채소가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계절반찬 10가지가 나오는데, 아주 정갈하다. 솔내음 041-836-0116. 최세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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