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가지 않은 길
/강은교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거기 길이 있는지 몰랐었다. 소나무의 군락이 너무 멋져서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난 첨 보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십 년 넘어 그 곁의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 길을 못 보았다니…. 소나무들이 저렇게 큰 것을 보면 그 전에도 분명 저기 저 소나무들이 있었을 텐데 어찌 한 번도 못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 그때 누군가가 아스라한 소나무 꼭대기에서 말했다.
지나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지
무색 얼음에도 반짝이는 무지갯빛
숲속 두 갈래 길 어디로 가야 하나
세상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듯 그렇게
"세상에는 매일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아름다움이, 그 모양은 물론 색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지!"
그 말은 나의 귓속으로 살살거리며 들어와 한참을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또 말했다.
"우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며, 흘낏 그 일부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무색의 얼음 속에서도 반짝이는 무지개의 빛깔에 황홀할 수 있으리라."
H D 소로의 목소리였다. 월든 숲에 한 칸짜리 통나무 집을 짓고 살았던,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었던 그런 사람. "가능한 한 매일 일출과 일몰을 바라보라. 그것을 당신 삶의 묘약으로 삼으라"고 도시의 사람들에게 일갈했던, 그런 의식과 패기가 있었던 사람. 나는 첨 보는 그 소나무들을 향하여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나는 여태껏 저기 있는 소나무를 보지 못했었어요. 그 속의 무지개를 눈치채지도 못했었어요"라고. 소로는 또다시 말했다.
"그러면 내친김에 한 가지 물어봅시다.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괜찮은 걸까요? 아니면 이미 갔던 길이나 열심히 가는 게 괜찮은 걸까요?" 라고.
나는 첨엔 "참, 쓸데도 없는 질문이네", 하다가 어느 순간 두 길을 놓고 끙끙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다 얼른 고민을 접는다. 이 젊지도 않은 나이에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애쓰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지, 세상에는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렇다고 패기도 없이 항상 가 본 길만 갈 것인가, 그래서 눈에 익숙한, 귀에도 익숙한 그 모양, 그 소리만을 들을 것인가. 인생이 도전이라고 늘 말하면서 말이다. 또, 젊은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늘 가 본 길만, 많은 이들이 가는 길로만, 쉬운 길로만 가라고?
그러다 보니 한 선생님 말씀이 생각났다. 오래전 어느 만찬 자리에서였다. 이름표를 가슴에 달지 않고 만지작거리고만 있는 나에게 식민지시대 문학 연구에 일생을 바친 유명한 원로 평론가 선생님이 마치 어린애에게라도 말하는 듯이 소곤소곤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남이 하는 대로 해요, 어서 이름표를 달아요, 강 선생." 그래서 나는 즉시 이름표를 가슴에 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나는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야, 하고 소리치는 듯한 그 이름표를. 아니 훈장 같은 인식표를. 순간 프로스트의 시가 나에게 달려왔다.
'단풍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더군요,/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 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그러다가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아, 또 하나의 길은 다른 날 걸어보리라! 생각했지요.//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 하겠지요/"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난 좋은 대답을 하나 생각하곤 으쓱한다. '그래, 젊은이에게는 아무도 안 간 길을 가라 하고, 젊지 않은 이에게는 많은 사람이 간 길을 가라고 하면 간단한 것을.' 그러다 또 '어이없는' 듯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어떤 늙은이가 자신이 젊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젊은이가 자신이 이미 늙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은 대답 없는 아침인가 보다. 다만 이런 말이 어디서인가 들려온다. 모든 길은 첨 가는 길이라고. 그 첨 가는 모든 길을 걸어 보라고, 세상의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