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의 세상 속으로] '모래 아이스크림'과 고리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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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원 논설위원

부산미학에 관심을 둔 처지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 기획이 있다. 올해로 개관 10돌을 맞은 고은사진미술관이 지난 2012년부터 10년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 중인 '부산 참견록(錄)'이 그것이다. 한국 중견 사진가 한 명을 매년 선정해 부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기록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그 결과물을 전시로 선보이는 한편 도록으로도 만들어 내는 야심 찬 기획이다. 부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열정이 없다면 섣불리 덤벼들기 어려운 작업이다. 전시장에도 가고, 몇 권째 도록도 받은지라 그 예사롭지 않은 정성에 감탄사를 터트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올해 '부산 참견록-모래 아이스크림'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사진가 정주하는 해운대에서 고리원전까지를 촬영 동선으로 삼아 핵 문제와 일상 속의 은폐된 불안을 렌즈에 담았다. 한국 최고의 관광지 해운대와 인근 고리원전의 기묘한 동거는 부산 삶의 이중성 혹은 양면성으로 곧장 육박해 들어갔다. 고리원전이 훤히 바라보이는 임랑 바닷가에서 모래 아이스크림을 만들며 놀고 있던 아이에게서 부산의 이런 이중성 혹은 양면성은 더욱 클로즈업되었다. 원전이라는 달콤한 문명의 이기와 그것이 가져올 재앙이 '모래 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으로 은유되었다.

부산의 역사성·지역성 기록
야심에 찬 기획 '부산 참견록'
올해 원전도시 이중성 다뤄

고리1호기, 18일 역사적 폐로
기장 원전단지 재생 방향 관심
시민 깨어 있는 참여의식 절실


임랑 바다는 필자에게도 유년의 바다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서울에서 높은 분이 온다며 운동장이 갑자기 헬기장으로 변하기도 했고, 그러는 사이 원전 돔도 서서히 올라갔다. 원자력발전은 놀라움과 호기심의 대상이었지만 지역경제의 흥청거림은 파시처럼 짧디짧았고, 많은 것들이 모래처럼 손아귀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간이 이내 찾아왔다. 바닷속 모래 위에서 발바닥 감촉만으로도 건져 올리던 임랑 바다의 그 많던 조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 옆 좌광천을 거슬러 오르던 은어와 민물장어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사람들도 떠나고, 해수욕장을 찾는 발길도 잦아들었다. 임랑 바다는 이제나저제나 모래 아이스크림 놀이터인 셈이다.

오는 6월 18일은 임랑바닷가에서 새 참견록을 써 내려가는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1977년 완공되어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한 고리원전 1호기가 설계수명 30년에다 10년 연장 끝에 이날 자정을 기하여 영구 폐로에 들어간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폐로 이후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월성1호기 폐쇄, 신규 원전 전면 중단 및 건설계획 백지화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범한 만큼 고리1호기 폐로를 시작으로 한국은 탈핵 시대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원전 주변에는 여전히 이중성 혹은 양면성의 안개가 자욱하다. 신고리 5·6호기만 하더라도 공사 중단이 아니라 공사 중단을 재검토한다는 설이 나돈다. 원자력 관련 학과 교수들과 한국수력원자력 노조 등에서 새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성명도 잇따랐다. 부산·울산·경남 환경단체들도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촉구하는 행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A 물체가 B 물체에 힘을 가하면 B 물체 역시 A 물체에 똑같은 크기의 힘을 가한다는 뉴턴의 '작용 반작용 법칙' 같은 현상이 혼란을 부채질한다.

고리1호기 폐로 이후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2015년 6월 제12차 국가에너지위원회에서 영구 정지를 권고했지만 '폐로 그 이후'에 대한 로드맵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해체에만 7~10년이 걸릴 거라는 풍문만 있을 뿐이다. 부산시는 올 초 원전해체센터, 신재생에너지산업연구원 등이 들어서는 신재생에너지 경제특구를 고리원전 일대에 세우자고 제안한 바 있다.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등 탈핵에 있어 새 정부와 부산시의 정책 방향이 같은 기조인 만큼 폐로 이후의 로드맵을 내놓는 데 힘을 모을 때다.

고리1호기를 시작으로 고리 일대의 8기 원전이 앞으로 차례로 폐로의 길을 걷게 된다. 옛날 옛적 그 옛 마을(古里)로 돌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최근의 도시 재생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훨씬 치밀하고도 장기적인 재생 프로젝트가 가동되어야 마땅하다. 은어와 민물장어가 다시 찾고, 살기 좋아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올 때 비로소 고리 재생을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전을 둘러싼 '부산 참견록'은 이제 다시 촬영 동선이 짜이면서 새로운 아카이브를 구축해 나가는 멀고 먼 대장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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