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준의 정의로운 경제] 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줄일까 늘릴까
새 대통령의 첫 업무지시가 일자리위원회의 설치라고 전해진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높은 관심과 의지를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해 그의 공약에는 4차 산업혁명위원회의 설치가 들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기술 분야가 일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먹거리 산업'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도 최근 외부 강의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받는 질문은 대통령의 인식과 정반대의 것이다.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은행들이 대폭 점포를 감축하면서 현실화되고 있는 우려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에 대해서 상반된 두 시각이 존재하는 셈이다. 어떤 생각이 맞는 것일까?
눈부신 기술진보 있었지만
노동자 노동시간은 줄지 않아
줄어든 노동시간의 이익은
생산수단 소유자에게 돌아간 탓
4차 혁명 이후에도 이런 구조라면
일자리 준 고용 없는 성장 뻔해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제는 생산과 소비의 두 바퀴로 이루어져 있다. 경제의 목적은 소비이고 생산은 소비의 전제이다. 그래서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서는 생산이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생산에는 시간이 소요되고 애덤 스미스는 부의 크기가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논증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생산을 늘릴 필요가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도구이고 도구의 발달이 기술진보이다. 기술진보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풍요로운 소비를 약속한다. 그래서 눈부신 기술진보가 이루어지던 20세기 초 케인스는 인류가 100년 이내에 하루 3시간의 노동만으로 4~8배의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누릴 것으로 예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의 예언이 틀렸다는 것을 보고 있다. 노동시간은 줄어들지 않았고 생활 수준도 그다지 크게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컴퓨터, 인터넷 등의 엄청난 기술진보가 이루어져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자동화기계와 컴퓨터가 도입되었지만 공장 노동자와 은행원의 퇴근 시간은 앞당겨지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일까? 해답은 줄어든 노동시간의 행방에 있고 그 행방은 생산의 구조 속에 숨어 있다. 생산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생산물의 처분권은 생산수단의 소유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전문용어로 '생산관계'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이들 두 요소를 두 사람이 나누어 소유하고 있다. 도구는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기술진보로 줄어든 노동시간은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갖는다. 케인스의 예언이 틀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자리에 대한 상반된 생각의 수수께끼도 여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생산수단의 소유가 지금의 구조 그대로인 한 4차 산업혁명이 줄인 노동시간은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가져갈 것이다.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든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줄지 않으면 하나의 일자리가 과거 여러 개의 일자리를 잡아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술진보는 그것을 뚜렷하게 보여 준다. 전문용어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혹은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것이다. 수백조 원의 유보금과 수익을 올린 30대 그룹이 지난해 일자리를 1만 3000개나 줄인 현실이 그것을 말해 준다. 결국 새 대통령의 기대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소유가 새로운 구조로 바뀌어야만 한다. 북유럽 국가들의 공동결정제도는 그런 구조의 한 사례를 보여 준다. 새 대통령의 경제인식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을까? 일자리 문제는 새 대통령에게 진정한 의미의 도전과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