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바보 사위와 사월 십오일
/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한국고전문학계에서 단연 뛰어난 이야기꾼 가운데 한 분이 이훈종 선생이다. 말솜씨 못지않게 글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퇴직할 때 기백 권의 고서를 다 버리면서도 선생의 낡은 이야기책 하나는 고이 집으로 모셔왔다. 1969년 여성동아 4월호의 부록으로 나온 <한국의 전래소화(傳來笑話)>가 그것인데, 혼자 낄낄거리며 보다가 정신 나간 놈이란 오해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등학교 교사 시절 선생이 해 주신 이야기 가운데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옛날 딸부자 영감이 살았는데 여섯 딸 다 시집보내고 막내 하나가 남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끝순이를 위해 이 딸바보가 물색 끝에 마침내 사위 하나를 얻긴 했는데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 녀석이 팔삭둥이 멍청이에다가 천하에 둘도 없는 게으름뱅이였다. 공부로 입신하기는 아예 틀린 놈이라 어찌어찌 돈을 마련해 장사를 시켜 보았지만 한 달쯤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암행어사 이몽룡 꼴이라 서너 차례 해 보다가 그도 단념하니, 처가에서 놈은 천덕꾸러기가 될밖에. 그러던 어느 날 밤, 영감이 장지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사위란 놈이 두억시니처럼 버티고 서서 "세간일랑 다 두고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어서어서!"라고 재촉했겠다.
침략 시달려 피난처 설화 많아
동래성 전투는 부산의 슬픈 역사
후일을 기약하는 전략 아쉬워
대뜸 욕설부터 내지르려다가 목소리와 행동거지가 평소와 180도 달리 어찌나 위엄이 있는지 놀란 영감 내외가 딸과 함께 허둥지둥 사위 뒤를 따르는데, 산을 몇 개 넘고 물을 몇 줄기나 건넜을까, 동이 틀 무렵 도연명의 무릉도원처럼 확 트인 멋진 마을로 들어섰다. 녀석이 문전옥답과 살진 우마를 갖춘 실팍한 기와집 앞에 서더니 "여기가 당분간 사실 곳입니다"라고 이른 다음,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영감을 이끌고 산마루에 올라갔다. 아득히 먼 산 아래에 불길과 연기가 오르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아뿔싸 바로 자기 동네가 아닌가. "지금 왜적이 쳐들어와 나라가 도륙이 났습니다. 제가 이럴 줄 미리 알고 주신 돈으로 약간의 전답과 집을 마련했으니 장인어른은 안심하소서. 여기는 일찍이 도선선사가 점지한 십승지지(十勝之地)이니 몸을 피하기에 딱 좋은 곳이올시다. 저는 이제 하늘을 대신해 왜적에게 불벼락을 내리려 하산하나이다."
지면이 부족해 친애하는 주인공의 걸출한 무용담은 독자 제현의 상상에 맡기거니와, 우리 옛이야기에 십승지지 같은 피난처에 관련된 설화가 많은 것은 이민족의 침략과 기근에 시달려온 민족의 슬픈 역사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여기에 비상한 이인(異人)으로 돌변해 해피엔딩의 대반전을 일구어 내는 바보 사위 이야기는 우리나라 설화에서 매우 낯익은 플롯이니, 조선 중기 군담소설인 '박씨전'이나 '임진록'처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민족의 패배감을 허구로나마 카타르시스해 보려는 안타까운 발버둥질이 아니었을까.
음력 4월 15일은 우리 부산의 가장 슬픈 역사가 기록된 날이다. 이틀 전 부산진을 급습한 왜적들이 동래성으로 쳐들어오자, 송상현 부사 이하 모든 부민(府民)이 읍성에 모여 결사 항전하다가 장렬히 옥쇄(玉碎)했으니 임진란 전사에서 가장 참혹한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종전 10년 뒤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동악 이안눌의 시 '사월 십오일'은 그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기록한 대서사시다.
고인들의 충절과 용기를 폄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혹 부민과 부병들이 위치상 전투에 불리한 읍성을 포기하고 험준한 금정산성으로 들어가 웅거한 채 적을 방어했으면 어땠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적과 대치해 시간을 벌면서 버티면 경상좌병영에서 병사를 초모해 남진해 올 수 있었을 것이며 지금의 장군봉과 양산 다방골에서 적을 협격하고 밀양부사 황진처럼 낙동강을 사수했으면 왜군도 "평지에 말달리듯" 금수강산을 휩쓸지는 못했을 것이 아닌가. 모를레라! 장렬한 전사도 좋지만 기습공격의 예봉은 일단 회피해 불필요한 병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