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공화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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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부국장 겸 디지털미디어본부장

"민심(民心)이오? 민의나 여론 같은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지요. 근데, 민심은 별로…."

지인인 일본인 교수가 올 3월 부산을 찾았을 때 화제는 자연스레 촛불 집회로 흘렀다. '민심은 천심이다'가 등장하자 대화가 느려졌다. 뜸을 들이던 그의 입에서 '민심'이란 말은 일본에서 낯설다는 뜻밖의 설명이 나왔다. '조선사' 전공자로 한국 사정에 해박한 그였지만 '민심은 천심이다'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교의 영향일까요?" 그는 즉답 대신 여운을 남겼다.

한자·유교 공유 한·중·일
유독 한국서 '민심' 위력적

'민심은 천심' 한국적 관념
공화주의 주권재민 상통

제7공화국 앞둔 새 정부
공동체 통합·신뢰 실패 땐
'성난 민심' 다시 거리로


중국에선 '민심'이 어떻게 읽히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인인 중국인 의사의 의견을 물었다. 중국 충칭에서 날아온 대답의 행간에서 뜨악함이 느껴졌다.

"예컨대 80%의 여론이 '천심'이라면 나머지 20%는 뭐란 말이지요?"

그는 '민(民)'은 '가장 귀한(民爲貴)'(맹자) 존재이자, '배를 띄우지만, 또 뒤집기도 한다(水則載舟, 水則覆舟)'(순자)는 고전 사상으로 운을 뗐지만, 현대 정치 상황에 접목시키는 대목에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한국적 맥락에서 민심은 계량화되는 찬반론이나 지지율을 넘어 내면과 행동의 영역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쓰임새가 차별화된다. 조선의 군주가 야심한 시각 궐 밖에 행차해서까지 찾으려던 바로 그것. 한국에서 '민심은 천심'은 절대 왕권 시대에서부터 중시되던 정치철학이었다.

한자와 유교 문화를 공유하는 한·중·일에서 오늘날 '민심'의 위상은 사뭇 다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가이드라인이 권위를 행사하고, 일본은 '국민통합의 상징'(헌법 1조)인 천황이 존재하는 점에서 차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민심의 추동력은 역사의 고비고비에서 결정적이었다. '성난 민심'은 들판의 불길처럼 전국적인 양상으로 분출했다. 헌법 전문이 내세우는 '3·1 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은 오늘날 계승되어 지난겨울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탄핵 촛불 집회를 낳았다.

'행동하는 민심'은 한국적인 특성이다. 그런데 그 특질은 절묘하게 공화주의와 맞닿아 있다.

공화주의는 공적인 결정(즉,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시민권의 원리, 공공의 가치 수호에 모든 시민이 책임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선공후사, 또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심성이다.

촛불 집회 참가자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조)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구호와 노랫말 속에 공화주의 주권재민 원칙과 '민심은 천심'이라는 신념이 동의어처럼 공명하고 있었다.

선출된 공직자의 도덕적 책임은 공화주의를 완성시키는 또 다른 핵심 가치다. 대통령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의 국정 농단은 분노한 민심의 준엄한 심판으로 끝났다. 촛불 집회는 한국에서 공화주의의 자정 능력이 정상 기능하고 있다는 걸 확인해 준 사례다.

노도와 같은 민심에 이끌려 어느덧 조기 대선의 막바지까지 흘러왔다. 내일 선거에서 한국을 이끌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30년 만의 헌법 개정으로 제7공화국의 마중물을 끌어내는 것이 새 정부의 과제다.

해방 이후 한국은 경제 성장과 민주화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큰 성취가 있었음에도 헬조선의 푸념이 넘치는 대목은 뼈아프다. 젊은 세대는 취업과 결혼, 출산의 포기를 강요당하고, 기성 세대는 노후가 불안하다. 상위 1%를 제외한 절대 다수가 미래에 불안감을 느낀다.

새 정부가 딛고 선 공화국의 기반은 만신창이다. 공동체의 신뢰는 실추되고 통합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다. 경제적 풍요와 절차적 민주주의 완성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난국의 지점에 와 있다. 공화주의 가치가 외면당한 결과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제왕적 행태, 은밀한 정경유착, 기회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구조적 차별….

새로 탄생할 공화국에서 또다시 보고 싶지 않은 구태다. 그런데도 반복된다면? 그때 다시 '성난 민심'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위정자들을 심판대에 세울 것이다. 그들이 공화국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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