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탐식법] 라면 먹는 아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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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가르침에 이런 말이 있다. '자고로 자장면은 당구장에서 먹어야 제맛이고, 잔치국수는 포장마차에서 먹어야 제맛이니라.' 어리석은 나로서는 자장면과 잔치국수의 진정한 맛을 아직 깨우치지 못했지만 어떤 '말씀' 같은 한 가지는 믿고 있다. '라면은 만화방에서 먹어야 꿀맛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만화책을 빌리기 위해 만화방에 자주 들렀는데 도서관을 몰랐던 나는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고마운 공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책을 읽는다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엄마는 그런 관대함으로 내가 이야기 짓는 사람이 되도록 키운 건지도 모르겠다. 대학 다닐 때는 만화방을 거의 매일 들락거렸다. 저렴한 데이트 장소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인과 함께 만화책 서너 권을 빌려보고 라면과 음료 등을 주문해서 먹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똑같은 라면인데 왜 만화방 라면은 이렇게 맛있냐며, 집에서 끓인 라면과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의 애인은 남편이 되었고 우리는 여가시간을 보낼 만화방을 찾아 헤맸다. 시내 번화가에는 만화카페가 유행이라고 한다. 쾌적한 시설과 예쁜 인테리어는 기본이고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 텐트, 다락방처럼 이색적인 공간을 만들어 번듯한 조리시설에서 음식은 물론 음료까지 제대로 만들어 판매를 한다고. 그야말로 별세계다.

하지만 변두리 동네에는 그런 시설을 갖춘 곳이 없다. 그나마 조리시설을 갖추고 비교적 깔끔한 만화방을 찾아냈다. '24시간 영업'이라는 간판을 단 지하 만화방에 들어가니 사방 벽을 빼곡히 메운 만화책과 인조가죽 소파에 앉은 중년의 아저씨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풍경이다. 그곳에 여자라고는 나와 카운터의 사장님 둘뿐이라서 좀 섭섭했다. '라면+밥'을 주문하고 한참 만화를 보고 있는데 "라면밥 두 개 나왔어요!" 사장님이 외쳤다. 카운터로 나가서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받아왔다. 만화방 라면은 여전히 맛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호로록, 호로록, 여기저기서 라면 흡입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만화방을 찾아온 아저씨들을 살폈다. 퇴직을 했거나 퇴근을 했을 그 아저씨들은 혼자 무협 소설, 판타지 소설, 만화책 등을 읽으며 음식을 먹었다. 가족과의 저녁 시간은 어쩌고 저렇게 혼자 책을 보는 것일까.

청년 시절 양복점에서 일했던 아빠는 그 나이대의 사내들이 그랬듯 쉬는 날이 얼마 없었다.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높게 쌓아놓고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아저씨들의 진지하게 책 읽는 얼굴이 꿈꾸는 소년 같아 아빠가 만화책을 읽었을 때 표정이 어땠을지 조금 짐작됐다. 소년 같은 아저씨라니, 혼자인데도 즐거워 보인다니 기분이 묘했다. "만두라면 나왔어요!" 아줌마의 부름에 한 아저씨가 카운터까지 나가 수줍은 표정과 어색한 자세로 라면 쟁반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꼰대'라는 내 속의 단어를 잠깐 지우기로 했다.

dreams0309@hanmail.net 


이정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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