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준의 정의로운 경제] 고공농성이 보내는 위기의 신호
지난 14일부터 서울 광화문 광장의 광고탑에 노동자 6명이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대통령을 끌어내렸던 촛불집회가 열린 바로 그 장소이다. 사실 이들은 이미 작년 11월부터 그곳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촛불집회 이후에도 이들의 문제는 전혀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이들이 고공농성을 시작한 이유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일지는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들이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생계의 절박함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리해고, 노조 활동, 비정규직 등의 이유로 모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것으로 당장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현대자동차의 최병승 등의 농성을 들 수 있고 신문에 보도조차 되지 않은 무수히 많은 농성이 있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자칫 고공농성이 노동현장의 일상적인 현상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정상적이고 심각한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체제적 위기를 맞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것이 위기의 신호인 까닭은 이 사태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촛불집회 열렸던 광화문에서
노동자 6명 고공농성 시작
생계의 절박함이 걸린 외침
체제적 위기 알리는 신호기도
노동부문의 사회 합의 복원 시급
대선 후보들 노동자에 눈 돌려야
노동문제에는 이해가 대립된 두 당사자가 존재한다. 이들 사이의 이해 충돌이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는 법률과 제도를 갖추고 있다. 노사관계라고 부르는 분야이다.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에 호소하는 것은 노사관계의 법률과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이해의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사회는 처음 등장할 때 구성원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고 고공농성은 이런 합의가 깨어진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이 사회적 위기의 신호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적 합의가 깨어지면 두 개의 갈림길이 주어진다. 새로운 합의를 다시 만들어 내든가 합의가 깨어진 상태로 남는 길이다. 후자의 길은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개별적 이해만을 좇아 갈등이 극대화되는 길이다. 그것은 문명에서 야만으로의 길이며 역사는 그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근대를 열었던 프랑스 혁명과 지난 세기 러시아와 크메르, 최근의 중동 사태가 모두 그런 사례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최근 촛불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깬 대통령을 탄핵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고공농성의 신호에 대응할 과제는 분명하다. 노동부문에서 사회적 합의를 복원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이해 당사자가 서로 상대방의 권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선 후보 가운데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탄압하겠다는 공약을 공공연히 내세우는 사람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이다. 우리 사회의 이런 후진성은 이미 국제적으로도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국제노동기구(ILO) 185개국 가운데 152번째로 1991년에야 비로소 가입한 노동 민주주의의 지각생이다. 그뿐만 아니라 ILO 핵심협약 8개 조항 가운데 절반만 비준한 상태이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전체 비준 협약 수에 있어서도 OECD 34개국 중 31위, ILO 전체에서는 128위에 머물러 있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이라는 나라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공농성이 일상화되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촛불 대선의 후보 가운데 고공농성이 보내는 이 위기의 신호를 올바로 인식하는 후보는 누구일까? 촛불을 들었던 유권자들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고 있는 이유이다.
강신준
동아대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