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편견의 전쟁
/이병국 부국장 겸 편집 2팀장
1998년 국내 출판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구사회의 폭군적 습관과 서구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회를 야만적이라고 경멸하는 것은, 서구인들의 중대한 편견이다. 세상엔 서로 다른 사회가 존재 할 뿐, 어디에도 '우월한 사회'는 없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주류사회의 반성문'은 청명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벌거벗은 채 살아가는 밀림의 한 부족이라 할지라도 고도화된 현대사회보다 훨씬 합리적으로 사회조직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고도화된 현대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우월할지는 모르나 정신적 측면에서 우열은 구분할 수 없다. 현대사회의 갈등과 충돌이 끝없이 분출되는 것은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믿는 서구적 사상과 제도에서 배운 편견의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편견과 차별은 기득권의 '적폐'
우월주의 내세우며 갈등 야기
편견 없어져야 차별도 없어져
유권자 우월한 선택이 변화 열쇠
프레임보다 정책과 공약 따져야
얼마 전 미국 유나이티드항공 3411편에서 강제적 좌석 양보를 거부한 한 동양계 탑승객을 짐승처럼 끌어내려 지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인종차별 논란과 함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현실을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이처럼 편견은 종종 차별과 폭력을 부른다. 서로 다름을 적대시하는 풍조는 산업화된 사회일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우월주의가 타협과 협상에 서툰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대통령 탄핵정국 여러 집회의 극한 대립 또한 같은 맥락이다. 편견은 이분법적 사고를 부르고, 차별의 프레임을 만든다.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을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특검의 기소를 자기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항변하고 나서 주목을 끌었다. 김 전 실장 측은 "블랙리스트가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조 전 장관 측도 '직권남용'혐의에 대해서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조 전 장관이 당연히 알고 가담했겠지 라는 추측은 깊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 권력의 지척에 있던 두 사람의 '편견과 오해' 변명이 궁색하기 그지없다. 우월적 위치에 있을 때 보여 준 '편견과 오해'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편견이 문제화되는 것이 대부분 기득권의 차별적 행동이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들을 인정하지 않고 입맛에 맞게 바로잡으려 한다. 기득권의 편견과 프레임이 위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대통령 선거 얘기로 가득하다. 안갯속 대선 판세 속에 후보 간 검증 공방도 어지럽다. 선거철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지역구도와 진영 간 프레임 전쟁이 이번에도 비켜가지 못했다. 색깔론과 이분법적 프레임 전쟁은 유권자들의 생각을 편견의 틀에 가둬 공약과 정책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정책대결보다 편 가르기를 앞세우는 선거전에서 '함께 잘사는 나라' 운운은 설득력이 없다. 선거가 갈등을 키우고, 정치권이 편견 만들기를 부추긴다면 그것이 곧 적폐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된 상태에서 치러지는 보궐 대선이다. 불행했던 박근혜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편견과 차별에서 출발한 '이분법적 사고와 정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레비 스트로스의 말처럼 세상 어디에도 '우월한 존재와 사회'는 없다. 우월한 선택을 하는 깨어 있는 유권자만이 편견 없는 사회를 만든다. 편견이 없어지면, 차별도 없어진다. 투표가 14일 남았다.
bk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