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래
고려가요의 어느 한 대목에 모래에 구운 밤을 심어 그 밤에 싹이 나면 임과 헤어지겠다는 구절이 있다. 구운 밤에서 싹이 날리도 없지만, 모래에서 싹이 날리는 더더욱 없다. 임과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는 화자의 결의가 애틋하다. 모래는 싹 하나 틔울 양분은 없지만, 많은 예술가가 소재로 삼아 왔다. 여느 암석이 그렇듯이 모래에서도 시원(始原)의 아득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시나 노랫말에 모래가 그토록 많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내 셋째 오빠는 노래를 잘 불렀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오빠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직장인으로 살다가 2013년 12월 말에 폐암으로 죽었다. 나는 오빠가 불렀던 노래 중에 '해변의 여인'을 좋아했다. '물 위에 떠 있는 황혼의 종이배'라고 시작되는 노랫말이지만, 끝까지 들으면 여자가 황혼 무렵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홀로 바닷가를 거닌다는 내용이다.
시, 노래의 소재인 모래
백사장 없는 바다 상상 못 해
그러나 모래 이식 강행은
바다 환경 파괴하는 행위
모래는 해양생태계의 심장
어민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나는 '해변의 여인' 속의 여인에게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결국, 그 여인에게 사연을 입혀 '슬리퍼'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썼다. 소설 주인공도 홀로 슬리퍼를 신고 황혼 무렵 백사장을 돌아다닌다. 의처증과 강박증세가 있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바닷가로 나온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했던 지난날을 담담하게 떠올리며 백사장을 걷는다.
'슬리퍼'를 구상하면서 나는 바닷가에 자주 나갔다. 해초와 조가비가 파도에 밀려오는 것을 보며 백사장을 서성였다. 백사장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거나 모래성을 쌓고 허물었다. 우리가 지순하다고 믿었던 것들은 모래성처럼 금세 허물어지고, 분노, 동정, 사랑과 미움 등도 물거품처럼 바스러지고 말기에 애면글면하지 않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몰입하려 했다.
모래는 물살과 파도와 바람에 쓸리고 깎였으면서 모질거나 여문 것과는 도통 거리가 멀었다. 저들끼리도 엉기지 못하는 모래였다. 모래는 처음부터 먼지가 되기 위해 암석 부스러기로 떨어져 나온 것 같았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나뒹구는 모래야말로 허망함과 덧없음을 빗대기에 그저 그만이었다. 졸작 '슬리퍼'는 백사장이 없었으면 구상조차 할 수 없었던 소설이었다.
백사장 없는 바다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부산의 주요 해수욕장에 모래가 줄어든다는 소식이 자주 들렸다. 부산해양수산청은 경북 울진의 동해안 모래를 채취해 해운대 백사장을 메우려 하다가 울진군과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수자원공사가 국토교통부의 위탁을 받아 남해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 모래 채취를 한다는 발표를 보았다. 남해 어민들이 바다 생태계 파괴로 어획량이 줄어 바닷모래 채취사업을 즉각 중단하라며 시위에 나섰다는 것이다.
백사장을 메우는 것도 좋지만, 어민들을 울리고 바다 환경을 파괴해가면서까지 모래 이식을 강행해야 할까. 엊그제는 송도해수욕장에 보충한 모래가 신고 채취량보다 10% 정도 많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게다가 바닷모래를 채취한 뒤 흙 등으로 메워 원상회복해야 하는데 해양수산부는 채취 지역에 대해 원상복구 할 의무가 없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수산자원 보호에 앞장서야 할 해수부가 환경파괴에 앞장선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전국 수협조합장들이 각 대선후보가 선거공약에 반영했으면 하는 수산정책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선후보들에게 전해질 선언문의 주요 골자는 바다골재 채취로 인한 환경문제가 거론되면서, 수산자원 보호 등을 위해 바닷모래 채취 중단을 촉구하는 것이라 한다. 탁상공론과 주먹구구식으로 시행된 일들로 국민이 얼마나 많은 곤욕을 치르는지 잘 아는 후보들이라면 어민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모래는 은유의 알갱이이기 전에 해양생태계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이병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