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편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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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언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빡빡머리 때 젤 좋아한 시는 물론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고 그다음은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라는 제목의 시였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아니 그냥/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70년대 '유자약전'으로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받는 소설가 이제하가 마산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동갑의 문우 유경환의 편지를 받고 쓴 시다. 이처럼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숙명을 지닌 벗에게 띄우는 편지는 단순한 문자의 교환을 넘어 교감과 격려의 토닥임으로 기능한다. 혹은 사랑에 빠진 이에게 편지는 아무 고백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젊은이들이 익히 읊조리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그러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우리 같은 사람에게 글은 밥벌이의 고마운 도구인데, 돌날 손에 연필을 잡은 지 예순하고도 오 년을 넘겼건만 아직도 글은 낯설고 무서운 존재다. 본업의 글이라 할 학술논문의 경우, 시험 삼아 백지에 크게 '논문'이라 쓰고 거꾸로 들여다보면 아시겠지만 이 녀석은 정말 사람을 펄펄 끓는 곰국 속에서 흐물흐물해진 도가니로 만드는 뜨거운 불길이다. 부업이라 할 칼럼이나 수필의 경우 사정은 더욱 어려우니, 마감시한이 다가오면 그 초조함이란 필설로 다할 수가 없다. 선불 맞은 멧돼지나 우리에 갇힌 불곰처럼 책상 앞을 우왕좌왕하며 혼자 화를 벌컥벌컥 내다가 겨우겨우 되지 못한 글을 몇 줄 끼적이고 한숨을 내쉬게 마련이니, 빚 중에서도 글 빚이 젤 무섭다는 말이 진리이며, 논문이 연옥불이라면 수필은 지옥불이라는 깨달음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인문 지성사 엮은 줄거리는 편지
진솔하게 마음 토로하는 장르
편지 오가면 세상 더 소중해져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대웅전이 와르르해도 받쳐 줄 부처님이 있듯, 내 경험의 법칙으로 보아 메마른 두뇌에 한 모금 단비를 적셔 주는 고마운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편지글이다. 글감이 도무지 아득하고 첫 줄을 못 떼어 붓방아만 찧다가도 좋아하는 친구나 마음에 남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맨 앞에 부를라치면 그 뒤부터는 그냥 상상력의 행보만 좇으면 되는 것이니, 마치 스스럼없는 이와 가오리무침에 막걸리 잔을 놓고 나직이 나누는 정담처럼 글줄이 거미 똥구멍에서 거미줄 나오듯 이어지는 모습을 놀랍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초등학교 사회책에도 나오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어떻든 말 붙일 데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혼자서 담벼락에 헤딩을 해 보았자 혹밖에 더 나겠는가.

해바라기의 화가 반 고흐가 유일한 지원자였던 동생에게 보낸 '사랑하는 테오야'로 시작되는 슬픈 편지나 우수의 시인 릴케가 한 문학청년에게 준 '한밤중에 홀로 깨어나,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내면의 소리가 있는지 귀 기울이라'는 무시무시한 편지를 읽어 본다면 고독으로 가득 찬 인간의 본질에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는 구원과 희망을 암시하는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끝없이 말을 걸게 마련이다. 그것이 설혹 자기암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인문의 지성사를 엮는 가장 큰 줄거리는 고금동서 없이 성경(誠敬)을 기울인 편지였다. 당송팔대가의 선두인 한유는 불우한 문도에게 주는 편지에서 문학이 시대를 울리는 목탁임을 갈파했고, 백낙천은 절친인 원진과 나눈 편지를 통해 겸제(兼濟)의 민중문학을 자신들의 공통주제로 확립했다. 우리의 철인 이퇴계는 열두 해나 제자 기대승과 성정(性情)을 논하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한국사상사의 큰 맥을 세웠다. 구구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진솔하고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서간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며…"는 버리고 부산사람답게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했던 청마선생을 본받아 편지를 쓰자. 그럼 세상은 좀 더 소중한 것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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