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세상 속으로] 포토라인에 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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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논설위원

'1995년 12월 3일 경남 합천. 초겨울 논바닥에 200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검 출두를 거부하고 연희동 자택을 떠나 고향으로 오는 날이었다. 국민의 감시는 고속도로에서도 계속되었다. 전직 대통령은 휴게소 화장실도 이용하지 못하고 경부고속도로를 통과해야 했다.'

필자는 이런 우스개로 시작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도망이라도 칠까 봐 고속도로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칼럼을 쓸 당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검찰청 출두를 앞둔 시점이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감안해 언론은 과잉경쟁을 자제하고, 검찰은 불구속 조사하라는 취지였다.

대통령들 줄줄이 포토라인에
지나친 보도 조롱하는 느낌도

박 전 대통령 처신 반감 불구
예우·형평성은 지켜져야

이젠 사법부에 모두 맡기고
대선 등 미래로 눈길 돌리길

칼럼을 계속 옮기면 이렇다. '2009년 4월 27일. 이번에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서울 서초동 대검까지다.(중략)(노무현 전대통령이 받은)600만 달러에 대한 포괄적 뇌물죄가 전부라면 불구속 상태에서 법리 공방을 통해 유무죄를 가리는 것이 여러모로 합당하다. 불구속 수사로 자기방어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사법부가 강조해 온 불구속수사 원칙에도 맞는다. 전직 대통령을 가둬놓고 진실을 토해 내게 만들겠다는 것은 검찰권의 남용 내지는 수사 편의주의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서울서 합천까지, 김해에서 서울까지 전 과정이 생중계됐다. 국민의 알 권리라지만 알아도 별 실익이 없는 일에 '현미경' 보도를 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전직 국가원수를 불러내어 조롱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필자는 일부에서 제기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수사 요구 또한 마찬가지 차원이라는 판단이었다. 포토라인은 여론의 단두대였다.

2017년 3월 21일. 필자는 포토라인에 관해 과거 썼던 칼럼을 꺼내어 고쳐 적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검찰소환을 주제로 칼럼을 다시 쓰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파면까지 당한 뒤 피의자 신분으로 포토라인에 설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1일 오전 9시 25분께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청사 정문 앞에 나타났다. 이른바 포토라인에 선 것이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다"는 짤막한 말을 남겼다.

이날은 사저와 중앙지검의 거리가 가까워 기자들의 추격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의 서울 삼성동 사저 주변 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길을 내어 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든, 반대파든, 언론이든 이제 어린이들의 민원에 귀기울이길 바란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처벌을 바라는 국민의 여론이 압도적이다. 이런 와중에 노 전 대통령처럼 박 전 대통령도 불구속 수사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 전대통령의 혐의가 노 전대통령의 경우보다 훨씬 중대하지만 이미 현직에서 탄핵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구속 수사가 무리한 요구만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공방조차도 사법 당국에게 맡겨 놓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다. 지금 삼성동 사저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은 우리 사회에 별 실익을 주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뚜벅뚜벅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진하고 있다. 40여 일 뒤면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대통령 취임식도 할 틈 없이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과다한 보도나 인신 구속은 역사의 전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아무리 광장의 민주주의가 이겼다고 할지라도 전직 국가원수에 대한 예우는 지키는 것이 스스로 성숙한 사회로 가는 길이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경쟁자들이 공존하는 것이 열린 사회다.

동북아의 국제정세도 위험천만이다. 대통령의 부재는 심각한 국익의 침해를 가져오고 있다. 군비경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를 수십 년 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있다. 두 강대국은 한반도에서 여차하면 전쟁을 수행할 태세다. 대통령이 없는 남한만 유일하게 강대국 틈바구니 속에서 발언권도 얻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

이 칼럼이 또 다시 쓰이는 날이 올까. 어떤 이유로 다시 쓰일까. 시민혁명이 연거푸 승리하는 시기에 젊은 시절을 산 필자는 행운이다. 전직 대통령이 포토라인에 설 때마다 민주주의가 한 뼘씩 자라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젠 그렇지 않다. 좌와 우로 한없이 멀어져 반목하는 바에야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칼럼을 다시 고쳐 쓰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ye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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