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해인사대장경판 가치 확장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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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새해에는 으레 희망과 기대를 걸어 보는 게 상례이지만 정유년을 맞은 우리 사회의 현실은 그런 희망의 싹마저 보이지 않는 듯하다. 국내외 사정이 녹록하지 않고 더욱 꼬여 들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엎친 데 덮친 격일 터.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 속에서 국내외의 위기와 모순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하고 유수한 문화유산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온 다양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보다 더 모진 모순과 위기를 겪고 있던 고려 사람들은 세계적인 기록유산을 창조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국보 제32호로 유네스코(UNESCO)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해인사대장경판(일명 팔만대장경판)이 그것이다. 13주기의 병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려 고종 23년(1236)의 병신년에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정유년부터 완성된 개별 경판들이 처음으로 산출되었다. 780년 전 우리 민족이 발휘한 역사·문화적인 역량이다. 당대 고려사회는 혹독한 최씨 무인정권과 잔혹한 몽골침략으로 건국 이래 최대의 현실모순과 민족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국왕 고종을 비롯하여 고려사회의 전체 구성원들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염원에서 신분·이념을 뛰어넘어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사업에 16년 동안이나 참여하였다. 이에 동아시아사회 불교기록문화의 표준텍스트로 손꼽히는 세계기록유산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인들 민족적 위기 극복 염원
세계적 기록유산 팔만대장경판 조성
각 기관·지자체서 다양한 사업 펼쳐
각국 원천자료 체계적 정리 꼭 필요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지향한 조선시대에도 우수한 기록유산으로 인식하였다. 세종은 일본의 사신들이 단식투쟁 등을 벌이면서 해인사대장경판을 일본조정에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일부의 조선 관료들도 성리학적 통치이념을 내세워 일본 양도를 동조할 때 양도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국보'로 인식하면서 온전한 보존방안도 마련하게 하였다. 일본 역시 고려 말 이래 조선전기까지 해인사대장경판이나 그 인경본을 빈번하게 요청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일본의 국보로 삼겠다는 명분으로 요청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초기 여러 종류의 한역대장경을 대조·교정한 일본의 학승 닌초(忍澄)도 해인사대장경판이 당시까지 조성된 동아시아사회의 한역대장경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역사·문화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해인사대장경판은 13주기의 병신년과 정유년을 지나는 경계점에서 다시금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 기록유산을 온전하게 물려받은 2016년의 병신년과 2017년의 정유년이 교차되는 경계점까지도 그 성격과 가치를 지속시키고 확장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수행하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에서는 개별경판의 디지털사진을 검색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전체 경판의 보존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과 남해군·하동군에서도 관련 학술대회 등을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재청과 경상남도·합천군에서도 보존·학술용역사업 등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해인사 및 합천군에서 문화콘텐츠 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해인사대장경판에 대한 원천자료의 정리·분석과 역사·문화적인 성격 규명은 현재까지도 활발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아쉽다.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자료나 교과서에 중복적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오류정보가 바로잡히지 않을 때 일반 대중이나 학생들이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 우려스럽다. 이 때문에 병신년과 정유년의 경계점에 있는 지금부터라도 남북한과 중국·대만·일본 등지에 산재한 원천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성격 등도 객관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기간은 최소 10년 이상이 소요된다. 이런 사업이 지금부터라도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해인사대장경판의 조성 800주년을 맞이하는 20년 이후의 2036년은 우리의 부담을 한층 가볍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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