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다시 민주주의] 4. 항쟁의 진정한 주역,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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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중심에 섰던 노동자들 "잊힌 휴머니즘 되살아났으면"

송영수(왼쪽) 부산지역 일반노조 교육위원이 1987년 6월 항쟁 거리 시위 도중 부산진시장 상인으로부터 한 뭉치의 태극기를 받아들고 시위대 전체에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김재민 민주노총부산지부 보건소지부장에게 해주고 있다. 30년이 지났음에도 송 위원은 어제 일처럼 상세하게 현장을 설명하며 당시의 흥분과 감동을 기억해냈다. 김병집 기자 bjk@

연중 가장 춥다는 절기 '대한(大寒)'이었던 지난 20일은 매서운 바람과 영하의 기온에다 선물처럼 짧은 눈발까지 날렸다. 그날 오전, 부산진시장 어귀에서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라고 할 만한 두 사람을 만났다.

꽁꽁 언 날씨 탓이었을까. 송영수(56)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교육위원과 김재민(33) 민주노총부산지부 보건소지부장이 악수 인사를 위해 차례로 건넨 손은 무척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 이들은 오는 3월 말 전국 단위로 출범을 목표로 하고 있는 민주일반노조 전국연맹 준비위원회에 함께 몸담고 있다. 민주일반노조 전국연맹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게 될 노동조합 연맹 조직이다.

송영수 부산지역일반노조 교육위원

부산 귀향해 야학·노동운동 도와
6월 항쟁 땐 국본 노동계 집행위원
이후엔 '노동자대투쟁' 활동 기여
"촛불 이후엔 경제 민주화 이뤄야"

김재민 민주노총부산지부 보건소지부장

現 노동계, 비정규직 실태 열악
해고 방문간호사들과 법적 투쟁
비정규직 향한 왜곡된 시선 '한숨'
"양극화 해소, 비정규직 철폐에서"


■태극기 한 뭉치 받아들었던 이 거리

1987년 6월 항쟁의 뜨거웠던 거리 시위 현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송 위원이 꼽은 곳이 바로 자성대 고가도로가 보이는 부산진시장 어귀다. 그는 "부산역에서 서면으로 행진하는 도중 시장 골목 안 문방구에서 한 상인이 불쑥 나와 태극기 한 뭉치를 안겨주고 갔던 일이 생생하다"면서 "모든 시위대가 그 태극기를 흔들며 서면으로 진출했다. 투쟁기금 모금함을 돌렸는데, 그 자리에서 270만 원 정도가 거둬졌고 그중에는 금반지도 들어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는 이내 자성대 고가도로를 가리키며 "저기가 이태춘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떨어진 곳"이라며 엄중한 표정을 지었다. 태광고무㈜ 무역부에서 사무직 노동자로 일했던 이태춘 열사는 그해 6월 18일 퇴근 후 서면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했다. 인근 봉생병원으로 이송됐지만 24일 끝내 사망했다.

송 위원은 당시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부산본부'(이하 국본)의 노동계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상임집행위원장은 당시 노무현 변호사." 그가 잊지 않고 덧붙였다.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된 이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다시 야학운동과 함께 노동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했던 송 위원은 스물다섯 나이인 1986년 겨울 국본에 합류했다. 그는 "6월 항쟁 전후로 부산에서 벌어진 시위의 판을 학생대표, 시민대표들과 함께 짰으니 그야말로 대단했다"며 "항쟁이 본격화된 열흘가량은 낮에는 시위하고 밤에는 다음 날 시위 판 짜고 거의 잠을 못 잘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 지부장이 그제야 "그럼 그 다음이 노동자대투쟁입니까?"라고 물었다. 노동자대투쟁은 6월 항쟁 이후인 1987년 7월부터 9월 사이 전국적으로 1100여 개의 노동조합이 생기고 3600여 건의 쟁의가 일어난 노동계의 대사건이다.

송 위원은 "그때 부산에서만 100여 개 이상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면서 "6월 항쟁이 한창일 때 구서동 태광산업에서 어용노조를 철폐하자는 노조민주화투쟁이 벌어졌고, 이어 사상 국제상사에서 여성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휴가 보장, 사람다운 점심밥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여 많은 부상자를 낸 끝에 이기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당시 범내골교차로에 국본 노동자위원회 사무실이 있었는데 노조를 만들겠다며 하루에 5~6개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찾아와 새벽까지 상담을 하고 필요한 서류를 만들어가던 정신없던 시절이었다"고 덧붙였다.

1987년 7월 국제상사 직원들이 농성이 들어갔다. 농성이 장기화하면서 부산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오른쪽 사진은 화물 적체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시위 모습. 부산지역 유월항쟁 자료발간위원회 제공
■이젠 비정규직 문제와 싸워야

6월 항쟁 당시 겨우 네 살이었다는 김 지부장은 송 위원의 30년 전 이야기가 그저 놀라운 눈치다. 그는 "80년대 대학생들이 학력을 속이고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자 소모임 같은 걸 만들어 근로기준법과 노동운동에 대해 알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항쟁의 현장에서 선배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현실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송 위원은 "그때 우리야 절박함이 컸고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탄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폭발적으로 생겨났던 노동조합의 80% 이상이 지금 없어지거나 어용노조 형태가 되어버렸으니… 그때 좀 더 잘 했더라면 현재의 노동자들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2017년의 노동계 현실로 옮겨왔다. 김 지부장은 "겉모습만 보면 30년 전에 비해 노동 환경이 매우 좋아졌다고 하겠지만 정작 그 껍데기를 벗겨보면 열악하다 못 해 처참한 실정"이라고 운을 떼더니 "그 핵심은 역시 비정규직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동의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보건소 방문간호사로 7년간 일한 뒤 무기계약직 전환을 앞두고 있다가 해고 통보를 받았던 김 지부장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를 단순히 자신만의 투쟁으로 끝내지 않았다. 2013년 노조에 가입, 활동하면서 보건소지부장을 맡아 부산지역 7개 구청과 법적 투쟁을 하고 있는 21명의 해고 방문간호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김 지부장은 "사용자들은 여전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일회용품·소모품처럼 비정규직을 사용하다 해고하고 있다"면서 "심지어 헌법에 보장된 노조 활동조차 비정규직은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는 "구청 산하 보건소의 비정규직인 방문간호사로 일하면서 노조를 만들려고 할 당시 구청의 공무원노조로부터 '비정규직이 무슨 노조냐'는 식의 비난을 수없이 들어왔다"며 현실의 냉랭함을 전하기도 했다.
송영수 위원이 6월 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 노동자위원회가 있던 범내골교차로 건물 옥상에서 시위가 있던 중앙대로를 가리키고 있다. 김병집 기자
■촛불 다음엔 경제 민주주의 투쟁을

부산지역 촛불집회에 주말마다 참가하고 있다는 두 사람은 애석하게도 '촛불' 이후의 정국에 희망보다는 불안함이 더 크다고 입을 모았다.

송 위원은 "지금의 촛불 정세는 단순히 국정농단을 문제 삼고 박근혜 정부의 적폐를 청산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저항하는 범국민적 물결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현재의 투쟁 주체들이 그런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여러 가지 변수가 있겠지만 탄핵 이후 대선 정국에서 촛불의 힘을 재벌 해체와 경제 민주주의 쟁취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동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민주노총이 그런 동력 역할을 못 하고 있고, 그동안 정규직·대공장 중심으로 진행해 온 노동운동의 방향성 또한 반성하고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운동이 조직된 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지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지부장 또한 "1800만 노동자 가운데 85%인 1450만 노동자가 최저임금과 표준생계비를 충족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일벌레'가 차지한다"면서 "중소영세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듬고 그들을 조직해서 우리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발전시킬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양극화 또한 해결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근본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청년실업과 결혼 기피, 저출산 고령화, 고용불안 등등의 문제는 비정규직이라는 공통점을 관통하고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들이 크게 공감한 것은 '휴머니즘'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각박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 말이다. 송 위원은 "개인들이 속한 사업장이 다들 워낙 어렵다보니 비정규직에 휴머니즘을 발휘할 여력이 없는 듯하다"면서도 "좌·우를 따지는 정치 투쟁은 벗어버리고, 이제 모든 노동자들이 평등하도록 상·하를 따져보는 경제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엄중한 싸움이 남았다"고 평가했다. <끝>

김경희 기자 mis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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