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다시 민주주의] 3. 신명 나는 함성의 힘, 문화인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수호의 토대이자 자양분

지난 7일 부산 서면교차로에서 진행된 제10차 부산시국대회에서 김상화(왼쪽) 대표와 이광혁 씨가 문화공연을 보며 촛불 정국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선배 기자 ksun@

"부산개방대학이 어딘지 아세요?" 6월 항쟁 사진자료집을 살펴보던 김상화(55) 노는사람 대표가 빙긋이 웃으며 묻는다. 30년 전인 1987년 6월 18일 수천 명의 시민이 둘러앉은 부산 범내골교차로 앞에 '독재타도 호헌철폐 -국립부산개방대학-'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린 사진이다. 인디밴드 스카웨이커스 대표를 맡고 있는 이광혁(33) 씨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두 눈을 껌벅인다. 지금의 부경대학교로 통합되기 전에 부산수산대학과 부산공업대학이 있었고, 공업대학(88년 개명)의 87년 당시 이름이 개방대학이다.

김상화 노는사람 대표

1987년 초 그림패 '낙동강' 조직
6월 항쟁 땐 선전물 상당수 제작
"문화예술인 정치적 배제 아쉬워
가치 전환해 표현의 자유 지켜야"

이광혁 스카웨이커스 대표

2007년 밴드 '스카웨이커스' 결성
전국 주요 집회 현장 다니며 공연
"문화, 통일성 아닌 다양성이 생명
문화예술인도 정치세력화 돼야"

■다른 듯 같은 문화운동


"그때는 대학교 강당을 빌려서 현수막을 하루에 100장씩 만들곤 했어요. 지금의 부경대학교 체육관이 평지인데다 공간이 넓어서 주로 이용했죠. 한창 만들다 보면 시너 냄새 탓에 본드에 취한 것처럼 어질어질할 정도였죠." 1987년 초 김 대표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미술인들과 함께 그림패 '낙동강'을 만들었다. 미술운동으로 민주화에 기여하자며 결성된 전국 단위 '민족미술운동협의회' 활동의 연장이었다. 서면 부전시장의 한 건물, 김 대표의 10평 남짓한 작업실은 '낙동강'은 물론 문화패들의 '아지트'가 됐다. 연극패 '일터'와 '자갈치', 노래패 '노래야나오너라(노나라)' 등이 모여들었다.

김 대표와 이 씨가 부산도시철도 수영역 문화매개공간 쌈에서 '6월 항쟁 자료집'을 보며 30년 전을 떠올리고 있다. 강선배 기자
낙동강은 공식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6월 항쟁과 맞닥뜨렸다. 현수막과 깃발, 선전물 대부분의 제작을 담당했다. 부산진시장에서 천을 떼어왔고, 판화와 실크스크린 작업도 직접 했다. "동광동 인쇄골목 직원에게 부탁해 사장 몰래 밤에 찍어내기도 했어요. 여기 낙동강에서 그린 판화도 있네요. 예술적 가치보다는 선전·선동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었죠." 1987년 8월 부산지역 총학생회협의회에서 만든 '일보전진' 창간호에 실린 판화. 횃불을 들고 자주·민주·통일 세 글자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결기 어린 표정이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작품'이다.

활동비도 '지하세계'에서 충당했다. 김 대표가 서울 청계천에서 한 번에 10개씩 가요 테이프를 복사할 수 있는 기계를 사 와 밤새 '낙동강 표' 민중가요를 찍어냈다. "음질이 별로였지만 시위 현장에서 생각보다 많이 팔려 나갔어요. 마스크를 대신할 손수건도 엄청 만들었는데 최루탄 냄새를 피하려는 시민들이 많이 사 갔죠. 활동비 마련에 큰 보탬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왜 낙동강인가요?" 옛날이야기를 넋 놓고 듣던 이 씨가 묻는다. "부산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뜻을 담았죠. '강원도에서 발원해 부산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자.' 뭐 이런 의미인데, 다시 보니 촌스럽네요. 하하하."
그림패 낙동강이 그린 판화가 실린 '일보전진' 창간호
따지고 보면 스카웨이커스의 태생도 87년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2002년도에 제가 입학했을 때는 학생운동의 완전 끝물이었어요. 대학사회 전체가 개인화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이 돼버렸죠." 2007년 부산대 노래패연합의 대표를 맡고 있던 이 씨는 다른 노래패와 몸짓패 회원들을 모아 '웨이크업'이란 밴드를 만들었다. 선배들의 정신은 이어가되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웨이크업은 전국의 록페스티벌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형식'을 고민하다 '스카(Ska)'라는 장르에 꽂혔다. "세련되면서도 선동적인, 마치 피가 끓는 느낌이었어요." 그의 말처럼 스카를 접목한 웨이크업은 제대로 끓어올랐다. 이듬해 초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을 더해 브라스 밴드(brass band)로 거듭났다. 2008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입대한 이 씨는 앨범 제작을 마무리하기 위해 훈련소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피가 끓었다. 3개월 동안 녹음하고 나서야 다시 입대했다.
낙동강의 뒤를 이은 부산미술운동연구소 시절 김 대표의 판화. 김상화 제공
"2011년 제대한 뒤 멤버를 정비해 지금의 '스카웨이커스'로 재편했어요. 이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문제, 핵발전소 폐기 운동까지 굵직굵직한 이슈마다 무대에 올랐습니다. 데이트하다가도 집회 공연 요청이 들어오면 무조건 달려갑니다. 보통 주말 공연이 많아서 여자 친구에게 뺨을 맞은 멤버도 여럿 있어요."

■진화한 촛불, 감동과 반성

지난해부터 이어지고 있는 촛불집회를 보면 김 대표는 만감이 교차한다. "6월 항쟁 때는 미술이 단순히 도구로 활용됐고 저도 예술가가 아닌 일꾼으로 참여했어요. 지금은 훨씬 다양화됐어요. 그림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풍물 등 분야별 전문가들이 예술가로서 참여하고 있죠." 매주 시국대회 때 서면교차로에 차려지는 대형 무대도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었다. "행진하다 멈춰 앉으면 그곳이 곧 무대이자 공연장이 됐어요.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투입되면 곧바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판을 깔았죠."

집회 참가자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대표적인 게 '인증샷'이다. '채증'을 막으려 얼굴을 가렸던 과거와는 정반대 상황이다. "요즘엔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리는 등 성과들을 함께 공유하려고 하잖아요. 젊은이와 시민들이 광장에 계속 모이려면 오히려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최소한이면 돼요. 질서정연한 건 행진이면 충분하죠. 다양한 공간에서 다양한 성향의 친구들이 모여 해방구처럼 얘기를 나누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고 봐요."
스카웨이커스가 주도한 2013년 국정원 비판 공연
다만 문화예술인들이 여전히 중심이 되지 못하는 현실은 아쉽다. "문화예술을 통해 공감하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여전히 이런 걸 정치의 몫으로만 여기고 문화예술인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고 있어요."

"완전 동의합니다!" 이 씨가 격하게 공감을 표한다. 박근혜정권퇴진 부산운동본부에서 시국대회를 준비하는 기획연출팀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씨는 집회 초창기 대규모 판을 벌이려는 주최 측과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선배들은 통일적인 문화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시는 것 같아요. 저희가 만든 '하야송'만 해도, 이슈가 돼 기분 좋을 때도 있지만 너무 많이 불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위에서 누르는 게 아니라 밑에서 올라오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필요하죠. 선생님 나이 또래에서 이런 말씀하시기 쉽지 않은데,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이래서 늘 비주류고 왕따잖아요…. 하하하." 후배의 존경 어린 시선이 김 대표는 마냥 쑥스러운 눈치다.

■촛불 이후 '가치 교체' 이뤄야

부산국제영화제 '다이빙벨' 상영 논란, 박근혜 대통령 풍자그림 탄압,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등 문화예술의 본질인 '표현의 자유' 문제를 토론 주제에 올리자 김 대표와 이 씨의 목소리는 한층 뜨거워진다. "요즘은 영화 한 편, 그림 한 장면이 사람의 정서를 움직입니다. 정권이 블랙리스트를 꼼꼼히 챙겨 불이익을 주는 것도 문화가 가진 힘과 파급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방증입니다."
지난해 11월 박근혜대통령 하야촉구 페스티벌. 이광혁 제공
김 대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 씨가 입을 연다. "블랙리스트 명단을 보면 더 어처구니가 없어요. 야당(민주당)에 친한 단체들은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더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청년단체들은 빠져 있거든요. 하물며 저는 입대 전 활동 때문에 군 복무 시절 기무부대 조사도 받았고, 지금도 이렇게 활동하고 있는데 명단에 없더라고요. 참나."

김 대표는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성장·성과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가치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성정에 맞는 삶이 존재한다는 걸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재화의 근본 구조가 돼버린 부동산도 마찬가지예요. '공유하는 공간'으로 그 가치를 바꿔낸다면 생각의 자유로움이 움틀 수 있습니다. 아파트 평수로 나와 남을 비교하는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생각을 절대 존중할 수가 없죠."

"와~ 이런 얘기 너무 좋아하는데."선배를 바라보는 이 씨의 눈빛에 존경함이 그득하다. "그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힘든 건 '하지 마라. 너네 꺼 챙겨라'는 충고였어요. 옛날에는 학생운동 하면 응원해주셨잖아요. 지금 촛불 정국에서 옛 10년의 '한풀이'를 하는 것 같아요." 이 씨도 당당하게 미래를 그려본다. "문화예술인들이 좀 더 정치세력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당에 가입하든 아예 정당·단체를 만들든, 일상의 정치를 더 강화해야 합니다. 투표만해서는 세상이 안 바뀌잖아요." 기성세대에 대한 당부도 있지 않는다. "선배님들이 봤을 땐 서툴러 보이겠지만 너그럽게 좀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해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얘기할 기회 말이죠. 아무튼, 선배들을 존경합니다. 저희가 더 새로운 걸 이뤄내겠습니다."

후배의 다짐이 선배를 더 부끄럽게 한다. "처한 상황이 다른데, 선배가 후배에게 용기를 북돋운다는 게 사실 말이 안 되죠. 그래도 이 말만은 해주고 싶어요. 후배들아, 거침없이 살아라!"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김상화


1962년 부산출생
1987년 그림패 '낙동강' 결성
2000~2014년 부산예술대학 만화 애니메이션과 교수
2000~2007년 부산독립영화협회
대표 2005년~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 영화제 집행위원장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
2015년~ 노는사람 대표







이광혁


1984년 부산출생
               /부산대 법대 졸업
2007년 밴드 '웨이크업' 결성
2009~2011년 군 복무
2012년 밴드 '스카웨이커스'로 재편
2014년 정규 1집 'Riddim of Revolt' 발매
2016년~ 촛불집회 외 문화공연 다수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