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역사, 원양어업 60년] 1부 흔적찾기 ④ 이인호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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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포한 88t짜리 日 목선 개조해 망망대해로 첫 원양실습

1957년 7월 첫 원양 실습을 떠나는 홍양호에 탄 부산수산대 학생들이 부두에 배웅하러 나온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기적인기라. 홍양호는 싱가포르 해역에서 조업을 마치고 대만 지룽(기륭) 항에 입항해 있었어. 근데 자고 일어나 보이(보니) 바로 우리 뒤에 지남호가 들어와 있는기라. 그 유명한 지남호가. 우리도 몰랐어. 자기들도 몰랐지. 근데 지남호에 타 있는 사람들이 다 우리 수대(수산대) 선배들이라. 만세를 불렀지. 선후배가 남의 나라 항구에 앞뒤로 붙어있으이 얼매나 감격스럽노. 그래 반갑다고 아침부터 야단이 났어. 선배들이 마구로(참치) 잡은 거 두 마리를 넘겨주데. 그때 우리 동기들이 깨달았지. '아, 우리도 원양 개척을 하면 되는구나. 원양 나갈 길이 터졌구나' 하고 꿈을 꾸게 됐지."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첫 원양실습선 홍양호에 탔던 이인호(84·전 부산수산대 교수) 선장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1957년 첫 원양실습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한 듯, 60년 전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그때 홍양호에 같이 탔던 이가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54학번 동기, 훗날 동원그룹을 일으켜 세운 김재철 회장이었다.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졸업반 학생들
교수 압박 수차례 문교부 설득
1957년 홍양호 타고 대만으로 출발

달러 한 푼 없이 가져간 사과 팔아
식사·목욕·이발 등 일상사 해결

지룽 항서 지남호 조우 감격하기도

■나포한 일본 목선으로 떠난 첫 원양실습


1957년을 우리나라 첫 원양어선 지남호의 출항 연도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그해는 부산수산대 학생들이 목선을 타고 첫 원양실습을 떠났던 원년이기도 하다. 대만 기륭 항에서 지남호와 홍양호가 조우했던 게 1957년 10월이었다.

"처음에는 원양실습 떠나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 그때 졸업반이었던 내나 재철이, 장원석이가 엄청 투쟁했지."

당시 이 선장을 비롯한 졸업반 학생들은 문교부에 원양실습을 수차례 신청했지만, 번번이 불가 통보만 받았다. 개인이 1달러도 소유할 수 없던 시절, 전쟁의 살벌함이 채 가시지 않아 땅과 바다가 막혀있던 시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 선장과 동기들은 수산대학장이었던 김하덕 교수, 어로학과장 전찬일 교수를 압박해 문교부의 승낙을 끌어냈다.

"근데 배가 어디 있나. 그때만 해도 연안에서 조업하는 30~40t짜리가 전부였어. 근데 마침 나포한 일본 채낚이어선이 하나 있었던 기라. 일본에서 건조한 지 얼마 안 된 신조 어선이 1955년 첫 출항을 나왔다가, 마침 이승만 라인을 침범해가 해양경찰대에 나포됐어. 88t짜리 목선이었는데 그걸 우리 수대에서 받아 국내 실습선으로 써왔지. 근데 원양실습을 갈라믄 최소 톤수가 100t을 넘겨야 한다는 기라. 없는 돈 들여서 겨우겨우 103t으로 개조했지. 그 작은 배를 갖고 망망대해로 19일간 원양실습을 떠났어." 지금 부경대 실습선 가야호가 1737t이니 그와 비교하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당시 부산수산대 학생들은 대만 기륭에 기항해 선진 수산국이었던 대만 어시장을 둘러보며 어획물 취급과 판매, 저장, 수송, 수산 행정 등에 대한 견학과 조사를 했다. 첫 원양 실습선은 실습과정에서 처음으로 잡은 무게 15관(약 56㎏)에 이르는 대어 청새치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져다줘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만서 사과 하나면 저녁 먹고 목욕까지

1957년 문교부로부터 어렵게 원양실습 허가를 받아내 대만으로 떠나기로 했지만, 1인당 20달러씩 입금되기로 한 게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달러 한 푼 없이 배를 타고 나갔다 아이가. 대만으로 돈 보내준다는 것만 믿고. 지금 생각하니 진짜 무모했지."

홍양호가 보급품을 보충하기 위해 사모아에 들렀을 당시 원주민과 교민들이 열렬하게 환영하는 모습. 이인호 선장 제공
달러는 없었지만, 학생들 주머니에 사과 몇 개씩은 들어차 있었다. "어디서 주워들으이 대만에 갈 때 사과를 좀 가져가면 재미있다 카는 기라. 돈이 된다는 기라. 우째 한 상자를 가지고 갔어. 날짜가 며칠씩 걸리니까 상할까 봐 걱정도 됐지. 근데 진짜 돈이 되는 기라. 거짓말 안 보태고 한 개 팔면 그걸로 한 사람 목욕하고 저녁 먹고 이발까지 다 했어. 그게 되더라고. 그만큼 비쌌어."

오징어는 더 했단다. "그 당시에 오징어 한 축만 가지고 가면 대만에서 여러 사람이 잘 먹고 구경까지 잘하고 온다 했지. 그럴 리가. 이상하다. 오징어가 와일노 했더만, 대만에 오징어가 없더라고. 대만에서 극장에 들어가는 걸 가만히 보니까 오징어를 네 토막을 내서 한 토막씩 사서 극장에 들어가는 기라. 우리도 오징어를 더 많이 가져갔으면 더 좋았겠다 했지. 우리나라에서는 오징어가 아주 흔했거든, 울릉도 오징어가 그때도 알아줬지. 근데 나중에는 대만 경찰들이 밀매 단속을 엄하게 해서 잘 안 됐어."

첫 실습단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과 주중대사(김홍일 장군)의 도움으로 김 장군이 만들어준 돈 14달러씩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실습 도중 기륭 항에 내려 난생처음 바나나와 파인애플이란 것도 먹을 수 있었다.

■"필요한 사람 쓰게 다 주고 가야지"

이인호 선장은 홍양호와 우리 손으로 만든 실습선 철선 백경호의 선장이었다. 원양 개척 시대 주요 선장들을 그가 다 길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준다 생각합니더. 쓰임새 있게 쓰여지면 되이 얼마든지 가져가이소." 귀하게 모아놓은 자료며 정성스럽게 스캔한 사진들을 이렇게 다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자 돌아온 이 선장의 답변이었다.
이인호 선장이 홍양호를 타고 원양 실습을 나갔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윤민호 프리랜서 yunmino@naver.com
"원양어업 개척할 때 고생했던 후배들, 머나먼 바다에서 생명을 바치면서 가족과 부모와 동생, 나아가 조국을 봉양하려 했던 이들 원양선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더. 우리가 이래 먹고사는 건, 다 그 사람들 덕분입니더."

이인호 선장이 선박 건조 감독을 했던, 우리 힘으로 만든 첫 실습 어선이자 베링 해 어장을 개척했던 백경호에 대한 얘기는 다음 주에 이어진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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