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태현 칼럼] 나라부터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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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현 논설실장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북핵 문제, 중국과의 사드 갈등, 일본의 소녀상 압력, 트럼프 미국 차기 행정부의 예측불허 외교정책을 한국 외교를 위협하는 '4각 파도'로 언급했다. 북한은 올 3월 한·미 키리졸브 군사훈련에 맞춰 핵과 미사일 실험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경제 보복에 나선 중국은 최근 서류 미비 등을 이유로 일부 한국산 화장품 수입을 불허했다. 군사적으로도 중국 핵 폭격기 등 10여 대가 지난 9일 우리나라와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을 침범해 대한해협과 동해 상공을 누비며 위협 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한·중·일 3국의 군용기 50여 대가 동시에 한반도 주변을 비행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을 견제하는 중국의 한국 길들이기라는 인상이 짙다.

'사드' '소녀상' 외교전쟁 불러
냉전 종식 후 가장 엄중한 환경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 대응할
결집된 외교 전략 없는 게 문제

현대판 '시일야방성대곡' 우려
당파주의 청산 정치 반전 기대

일본은 부산 소녀상 설치를 빌미로 주한 외교관을 일시 귀국시키고,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을 중단하는 등 외교적 보복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양국 합의에 따라 10억 엔을 출연했으니 한국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사실상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무산과 쿠릴열도 4개 섬 반환 협상 실패로 각각 트럼프와 푸틴 대통령에 밀린 아베 총리가 자국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한국을 의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다음 주 취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로 인한 불확실성의 증대도 한반도 관련 전망과 예측을 힘들게 한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자꾸 심화되어 가는데, 기존의 한·미·일 3국 공조 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불안한 형국이다.

한국이 처한 작금의 외교적 현실은 구한말의 상황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고립무원의 가파르고 어지러운 절벽 앞에 서 있다. 강대국들이 한국의 주권과 국민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외교부조차도 냉전 종식 이후 가장 엄중한 외교 안보 환경이 전개될 것이란 신년 업무보고를 내놨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패권주의가 노골화되고 있는 정세는 구한말의 판박이가 아닐 수 없다. 단지 간섭과 압박의 내용과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강대국들의 의도대로 우리의 외교가 끌려다니기만 한다면 현대판 '시일야방성대곡'(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의 외침이 곧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위기감마저 든다. 지금을 을사조약 당시와 비교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하지만 열강의 압박과 위협으로 나라의 경제와 외교가 휘둘리고 주권이 침해받는 정치적 풍경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무기력한 안보 불감증에 빠진 듯 아무런 국가적 외교 전략과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민 단결과 정치력 결집은커녕 대통령 탄핵심판 정국의 국가 리더십 공백기에 혼란만 조장하는 꼴이다. '친문'이니 '반문'이니 하면서 정치철학 없는 패권적 당파주의가 횡행한다. 조기 대선이 예상됨에 따라 벌써부터 여야 할 것 없이 상대 후보들을 공격하기에 바쁘다.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다시 빼들어 대선판을 내려치려는 움직임도 있다. 어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귀국을 기화로 대권 주자들의 정치공법적 행보가 더욱 빨라지는 등 대선구도는 요동치고 있는데, 위기에 처한 외교안보 논의는 뒷전이다.

'사드 보복' '소녀상 보복'으로 촉발된 눈앞의 외교전쟁을 막을 방도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게 문제다. 때를 놓치면 외교적 복구력을 회복하기 힘들다. 어느 한 강대국에 치우친 섣부른 판단과 실행도, 속수무책의 방관도 답이 아니다. 외교적 무리수든 외교주권 상실이든 그 어느 쪽도 국익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해당 사안과 관련된 다른 국가들과 긴밀히 공조하는 전략적 접근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키고 위기를 관리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당파주의를 청산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부터 구해야 옳다. 국난 극복의 공동 목표 아래 정국 혼란을 승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금부터라도 거국적인 차원의 외교 정책과 전략을 제시하고, 협상하고, 수렴해야 한다. 악화일로의 경제를 살리는 정책과 함께 대선 공약으로 내걸어야 할 핵심 사항은 바로 외교 안보 위기의 타개 방안과 비전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권욕만 가득해서는 정치 문화의 대반전(反轉)을 기대하기 어렵다.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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