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고전과 세태] 2. 석과불식(碩果不食)-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주역>
오는 15일은 고 신영복(1941~2016) 선생의 1주기 날이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관계론의 인간학과 약자들의 연대를 주창했던 휴머니스트 신영복 선생.
그가 생전에 가장 아낀 희망의 언어가 바로 '석과불식(碩果不食)'이다.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생은 씨 과실을 최후의 양심 혹은 최후의 이상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겨울날 감나무의 잎은 다 져 버리고 붉은 감 한 개가 가지에 달랑 매달려 있는 스산한 풍경이 바로 그 이미지이다.
"겨울날 잎 떨군 감나무 가지에
홍시 한 개 달랑 달린 풍경 연상
산지박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나타내지만 절망에서
희망을 찾으라는 메시지이기도"
석과불식은 <주역> '산지박괘(山地剝卦)'의 상효(上爻)의 효사(爻辭·효의 의미를 설명한 것)에 나온다. '석과불식 군자득여 소인박려(君子得輿 小人剝廬).'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군자는 가마를 얻고 소인은 거처를 빼앗긴다'고 해석된다.
산지박괘의 상괘()는 산(山)이고 하괘()는 땅(地)이다. 이 괘는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된다. 초효부터 5효까지 모두 음효이다. 오로지 여섯 번째(상)효만 양효이다. 세상에 악이 득세하고 있는 말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로 전락할지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대통령은 탄핵되고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으며 외교·안보는 길을 잃어버린,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이 딱 이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이 같은 절망에서 희망을 읽어내야 한다는 게 선생의 주역 독법이다. 어떻게? 선생은 씨 과실이 희망의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고 나목으로 삭풍 속에 서듯이, 우리 시대의 모든 허위의식을 떨어내고(葉落(엽락)), 실상을 대면하는 것(體露(체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뿌리를 거름하는(糞本(분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다시 희망가를 부르고 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1000만 촛불이 어둠의 심연을 환하게 밝힌 덕분이다. 촛불은 현재진행형이다. 시민들이 밝힌 촛불이 아둔·무도한 정치와 탐욕스러운 경제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대한민국의 '씨 과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자 양심이다. 이 희망의 싹이 터 모두가 함께 잘 사는'더불어 숲'이 되도록 힘을 써야 한다.
<주역>의 사상은 세 마디로 요약된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窮則變(궁즉변)), 변하면 통하고(變則通(변즉통)), 통하면 오래 간다(通則久(통즉구)).' 국가든 개인이든,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하더라도 노력하면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단, 조건이 있다.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논설위원 hoh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