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2017 다시 민주주의] 2. 민주주의 발전의 꽃,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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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에 저항" 청춘들의 함성, 30년 뒤엔 촛불로 타올랐다

지난 5일 부산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세워진 부마항쟁 기념탑을 1987년 총학생회 선배들과 2016년 총학생회 후배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이강인·김종기 씨, 그리고 양인우·유영현 씨.

"학교가 많이 바뀌었네요. 아! 우리 후배님들 기다려집니다." 지난 5일 오후 4시, 부산대학교 본관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강인(56) 씨가 미리 캠퍼스 곳곳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라며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대 총학생회에서 인권복지위원장을 맡았다. 뒤이어 지난해 부산대 부총학생회장 양인우(25) 씨와 총학생회장 유영현(25) 씨가 도착했다. '전설' 같은 선배님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1987년 부총학생회장 김종기(56)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면식도 없었던 대학 선후배들이 그렇게 한자리에 모였다. 81학번과 11학번. 무려 30년의 시간 차를 둔 그들이다. 반가움과 묘한 흥분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30년 전 우리 "그땐 그랬지"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30년 차 대학 선후배들, 그것도 소위 '운동권 학생' 출신인 4명은 이내 1987년의 부산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장소를 정문 앞으로 옮겼다. 김종기 씨는 "6월 항쟁이 있던 87년은 1년 내내 수배자 신분이었다"면서 "당시엔 그나마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집회를 열고 시위를 이끌어 갈 동력이 대학생들밖에 없었고, 특히 부산대는 앞서 봄학기 개강과 함께 학원민주화투쟁을 시작한 것이 학생들의 대규모 거리 시위 참여에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과거 부산대 학원민주화 투쟁
독재 맞선 대중 투쟁의 중심 역할
서울서 사그라든 민주화운동
부산 가톨릭센터 농성으로 재점화

촛불집회, '6월 항쟁에 버금' 평가
방식 달라도 '민주화 열망' 엿보여

"촛불 종착역은 민주주의" 한목소리


그는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할 수 없었는데도 학생회는 늘 정치 투쟁만 하던 때였다. '한 사람의 백 걸음보다 백 사람의 한 걸음을'이라는 구호 아래 부산대 총학생회가 당시 처음으로 학내의 비민주적 요소들을 없애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면서 "예를 들면 부대신문사 기자를 대학원생들로 바꿔 학내 언론을 길들이려는 학교 측 시도를 막는 학내 투쟁을 하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부산대의 학원민주화투쟁은 선도 투쟁 중심이었던 학생운동을 대중 투쟁 중심으로 바꿔놓았고, 이후 다른 대학 총학생회의 '벤치마킹'까지 이어졌다고.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29일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선배의 행방을 취조당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하자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정권의 4·13호헌조치에 맞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시민투쟁으로 이어진 6월 투쟁이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 개헌 선언'으로 항쟁은 '선거 민주주의'를 얻어내며 승리로 끝났다.

1987년 6월 항쟁 때 시민과 학생들이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범시민시국토론회를 개최했다. 부산지역 유월항쟁 자료발간위원회 제공
'절친'의 6월 항쟁 설명을 듣고 있던 이강인 씨는 "항쟁은 6월에 시작된 것이 아니며, 서울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17년간 이어진 박정희 군사 정권을 끝내려는 1979년 10월 부마항쟁과 전두환 군부 세력에 의해 무참히 학살된 1980년 광주항쟁의 경험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전 국민적 열망으로 터져 나온 것이 6월 항쟁"이라고 정의하면서 "그동안 6월 항쟁이 서울 중심으로 조명됐는데 언론 보도가 그쪽에 집중됐을 뿐, 실제로는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전국에서 동시 다발로 집회가 벌어졌다"고 전했다.

이 씨는 또 "서울은 6월 15일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명동성당 점거 농성을 해제한 반면 부산은 같은 날, 주말인데도 집회 참가 인원이 1만 명을 넘기면서 다음 날인 16일부터 가톨릭센터 점거 농성을 시작해 항쟁의 불씨를 이어갔다"고 덧붙였다.

가톨릭센터 점거 농성 때 김종기 씨는 대학생 대표로 참여해 농성을 주도했으며, 이강인 씨는 부산대 내에서 거리 시위 현장과 농성장을 연결·지휘하는 상황실장 역할을 맡았다. 이날 인터뷰에 함께하지 못한 김종삼 당시 부산대 총학생회장이 거리 시위를 이끌었다.

■요즘 저희 "각자 살기 바빠도…"

정문에서 운동장인 '넉넉한 터'를 지날 때쯤 김종기 씨가 "본관 건물이 들어서기 전 운동장은 정말 '넉넉한 터'였는데… 학원민주화투쟁 초반에는 100명, 200명 모였던 학생들이 4·5·6월을 거치면서 이곳을 가득 채울 정도로 늘어났다"며 추억을 더듬었다. 중앙도서관 앞 부마항쟁 기념탑으로 향하는 길에는 또 이강인 씨가 "학교에 사정해 문창회관 커피 자판기 하나를 빌려 이 돈을 모아 부마항쟁 기념탑을 만들겠다고 했었는데 1년 모은 돈으로는 모자라 후배들에게 수익금 넘겨주며 꼭 기념탑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난다"며 웃음 지었다.

한참 옛이야기를 꺼내놓던 선배들이 이제는 후배들의 일상이 궁금한 눈치였다. "요즘 대학생은 많이 다르죠?" 선배들의 질문에 유영현 씨가 "과거와 달리 저항의 문화가 대학가에 만연하지 않아서 참여가 다소 소극적인 측면도 있지만,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열망은 선배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지난 1년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문제에 관심 갖기에 앞서 당장 눈앞에 닥친, 먹고살 길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진 현실을 변명 삼기도 하는데, 이화여대 학생들이 정유라 부정입학과 학내 비리를 겪으면서 총장을 사퇴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청춘들의 잠재력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부산대학교를 거닐며 30년 전과 현재의 대학 학생회 활동에 대해 대화하는 모습.
양인우 씨 또한 "'헬조선'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지금의 20대는 역대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안정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희망이 사라진 세대지만, 세월호 사고 이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최근의 부산 소녀상 건립 운동까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여론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과거의 직접적 행동이 아닌 SNS를 통해 목소리를 내거나 대표 단체에 힘을 보태는 식으로 보다 다양하고 다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이강인 씨가 돌연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살기 좋은 요즘에도 운동권이 박멸되지 않는 이유는 뭐냐?"하고 말이다. 30년 전에는 '군부독재'라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에 취업을 포기하고 구속을 감수하면서도 거리로 나서면 나라의 미래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반면, 지금은 훨씬 민주적인 사회인데도 학생회를 묵묵히 꾸려가는 후배들의 결심이 궁금했던 때문이리라.

유영현 씨는 "세상이 많이 변한 건 사실이고, 과거에 비해 큰 용기를 내지 않아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억압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교묘해졌다"고 응답했다. 그는 "학생회는 학생들의 대표 기구로 권리를 지켜내는 역할과 동시에 학생들이 곧 진출할 사회의 변화·발전도 이끌어야 한다"면서 "청춘들이 처해 있는 여건과 상황이 달라진 만큼 그에 맞게 세심하고 전문화된 역할이 필요하기에 학생회와 운동권은 늘 존재한다"고 답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미래는 밝다"

이들의 대화는 약속된 2시간을 훌쩍 넘겼고 장소 또한 대학가 막걸리집으로 바뀌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촛불집회로 옮겨갔다.

김종기 씨는 "촛불집회는 부마항쟁과 6월 항쟁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민주항쟁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민주 시민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탄핵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린다 하더라도 민주 정부 수립에 실패하거나 야권 분열로 기득권 세력의 재집권을 허용하게 된다면 세월호 사태와 개성공단 폐쇄, 한·일 위안부 합의, 사드 배치 같은 이번 정권의 나쁜 정치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칠 것"이라며 "촛불집회의 귀결은 탄핵을 넘어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아들 뻘인 유영현 씨 또한 "현 시국을 통해 청춘을 비롯한 국민들은 잘못된 선택으로 나라의 지도자를 뽑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라며 "내 삶의 변화가 곧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깨닫고, 스스로 행동하는 국민적 촛불이 이어진다면 앞으로의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희망 찬 소회를 밝혔다.

30년이라는 세대 차이가 무색할 만큼 진지한 '시국 토론'이 이어졌다. 기자가 자리를 빠져나온 뒤에도 이들의 막걸리 잔은 밤늦게까지 채워졌다는 후문이다. 김경희 기자 miso@busan.com

사진=강원태 기자 w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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