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의 세상 속으로] 보수(補修) 없는 보수(保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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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민 논설위원

요즘 정가에선 보수의 분열과 재편이 한창이다. 서로가 진짜 보수라는 주장이 난무한다. 촛불시위에 놀란 정치권이 민의를 수용하는 과정으로 보면 긍정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에 책임져야 할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통렬한 반성을 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던 정치인들이 '우리'로 둔갑하는 진영논리로서의 보수뿐이니 문제다. 보수 없는 보수는 적폐일 따름이다.

대통령이 3주째 부재 상태다. 국무회의, 국회, 헌법재판소 등 국가 최고기관들이 초유의 사태에 우왕좌왕이다.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정치다. 국가 시스템을 복원시키고 국민을 안정시킬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인은 혼란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는데 그런 인물 복이 우리 국민에겐 없는 것 같다.

탄핵 끝나자 정당 생존 위해
원조 진짜 각종 보수 난무

국정농단 깊은 반성은 않고
보수세력 진영논리만 남아

진보가 끌고 보수가 밀어
변화 의지 하나로 뭉쳐야

어제 여당이 둘로 갈라섰다.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의원 29명이 집단 탈당을 공식 선언했다. 기존의 새누리당은 당 개혁을 추진하는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각을 세우고 있다. 제3지대에서 헤쳐 모여를 한다는 설이 나도는 국민의당은 비박 신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연대를 모색 중이다.

3개 정당의 분화는 보수라는 깃발 아래서 대충대충 거래되고 있다. 탄핵, 특검, 헌재 재판도 이해가 어려운데 정당들의 이합집산까지 따라잡자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 국민 하기가 참 힘이 든다.

보수라는 용어가 요즘 정치권의 키워드다. 선점 경쟁까지 벌어지고 있다. 비박계 신당은 가짜 보수와 결별을 선언했다. 유승민 의원은 보수개혁, 보수혁명을 주장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인들로부터 모셔가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짜 보수, 진짜 보수, 개혁 보수, 중도 보수, 합리적 보수, 건전한 보수, 원조 보수…. 별별 보수가 다 있다.

현재를 옹호하고 변화에 소극적이면 보수, 현재를 인정하되 점진적으로 바꾸자고 하면 진보다. 한편 과거에 집착하면 수구, 현재 질서를 부정하고 빠르게 변화시키자는 것이 급진이다. 요즘처럼 복잡한 사회를 담기엔 낡은 프레임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시민들이 보여 준 보수와 진보는 어떠했나. 보수와 진보는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친 촛불시위에서 만났다. 진보가 무대를 만들고 보수가 노래를 불렀다. 차이점보다 같은 점에 주목하였다. 변화에 공감한 보수와 진보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87년 체제를 낳은 6월 민주화운동에서 학생들과 넥타이부대가 그렇게 만났다. 보수가 밀어주고 진보가 끌어주면 작은 바람이 특급 태풍으로 변해 역사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대통령 탄핵에 성공하자마자 중도적, 합리적, 건전한, 진짜라는 형용사로 화장을 한 보수가 왜 이리 많은가. 정치인들이 허술해진 진영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보수를 표방하는 목소리는 또 왜 이리도 높은가. 화장하고 보수 뒤에 숨으면 국민들이 딴 사람인 줄로 알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반독재가 좌경용공으로 혼동되던 우리나라와 달리 서구에서 시작된 보수-진보 프레임은 진화와 발전의 과정이었다. 제1의 길(사회민주주의), 제2의 길(신자유주의), 제3의 길(중도 좌파의 실용주의) 등 끊임없이 정치적 실험을 진행 중이다. 불발되긴 했지만 스위스에선 지난 6월 '월 300만 원' 지급제 국민투표가 있었고, 핀란드는 내년 시범 시행을 한다. 우리와 실정이 다르긴 하나 상상력을 나누는 보수와 진보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와 진보 논객 유시민 작가가 진행하는 '썰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는 보수와 진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나 두 논객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일이 없다. 보수와 진보라는 프레임으로 현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개혁과 발전이라는 기준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전 변호사는 "김정일이 개××냐는 물음에 개××다고 대답하면 용공세력이 아니다"고 발언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유 작가는 지난 2003년 국회의원으로 첫 등원 하던 날 백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가 쫓겨난 적이 있다. 이런 '꼴통' 보수와 진보 인사들도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경계를 허물 때가 보수와 진보의 본모습이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보수를 표방하는 보수는 이제 수구의 자리로 물러나야 마땅하다. "박근혜를 찍었지만 촛불을 들었습니다"라는 시민에게서 보수의 자세를 비춰 보길 바란다. 진정한 보수(補修) 없이 화장만 고친 보수(保守)는 가라. ye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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