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 메고 떠난 남인도 기행] 35. 다시 배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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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통해 다시 배우게 된 건 사랑살이, 사람살이"

남인도의 결혼식에서는 쌀을 곱게 빻은 뒤 물을 섞어 복을 비는 그림을 그리거나 신랑·신부의 이름을 쌀물로 쓴다.

마지막에는 사랑을 한다. 나도 마지막을 위해 이 말을 아껴두고 있었다. 어쩌면 주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 생명의 근원. 연말이면 종말을 앞에 둔 사람처럼 해를 보든, 달을 보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정성껏 인사를 나누는 우리네 풍경.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트리를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듯 연말이면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사랑을 끄집어낸다. 내가 인도를 통해 다시 배우게 된 것도 바로 이 사랑살이, 사람살이다.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게 품을 내주는 삶에 대해 배웠다.

사탕수수 대로 만든 활 쏘는
인도 사랑의 신 '카마데바'

계급을 최우선 순위 두는 중매
가장 보편적 결혼 풍습이지만
별자리·종교·가문도 고려 대상

1년간 문화기행문 기고 끝에
품을 내주는 삶 깨달음 되새겨

길 가다 지친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한 뒤 안방을 내주고 친절을 베푸는 넉넉한 인심도 배웠다. 친절이란 실 꾸러미와 같아서 들어올 땐 뭉쳐있다 나갈 때면 끝없이 풀어진다. 인도에서 받은 실 꾸러미는 아직도 누군가를 향해 베풀면서 내 안에서 풀리고 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도 존재한다는 것,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한 사람살이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건 내 동반자 프라사드다.

인도의 결혼식
"당신은 하늘이 제게 내려준 선물입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먼저 귀국하면서 프라사드가 한국에 올 때를 대비해서 기본적인 한국어 회화를 녹음해서 공책과 함께 남기고 왔다. 그만 다른 녹음은 다 지워지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말이 이 문구였다. 프라사드는 다음에 만날 때 이 말을 꼭 해달라던 주문을 용케도 기억하고 나를 보자마자 이 말을 했다, 어눌하게, 무슨 뜻인지는 잊은 채로.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무대 위에서였다. 당시 아시안게임 기념으로 아시아연극제를 크게 개최하게 되었다. 학과 교수님이 인도에 있던 내게 인도 공연단 초청을 의뢰해 오셨다. 극단의 연습을 보러 갔다가 그 사람을 보았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많은 연기자 중에서 그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것이 일종의 '첫눈에 반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도에선 카마데바가 쏜 화살에 맞은 사람이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고 한다. 사랑의 신 카마데바는 장난꾸러기다. 재미로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아 지독한 아픔을 맛보게 한다.

카마데바의 활은 사탕수숫대로 만든다. 화살은 망고꽃, 아쇼카꽃, 흰 연꽃, 푸른 연꽃, 재스민꽃 등 다섯 가지 꽃으로 장식한다. 카마데바는 뻐꾸기, 앵무새, 꿀벌, 부드러운 바람과 동행하는데 모두 새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 봄을 상징한다. 인도에선 긴 머리에 코코넛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손질한 뒤 재스민 꽃을 엮어 머리에 다는 여성들이 많다. 어쩌면 카마데바를 겨냥한 건지도 모르겠다. 
제를 지내는 남부티리
인도의 결혼 풍습은 대부분 중매다. 결혼을 위해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것은 같은 계급이다. 그 외 종교, 가문, 직업 등 다양한 부분이 고려 대상이다. 카스트와 함께 중요한 것은 별자리다. 인도에서는 별자리를 통해 배우자와의 조화를 점친다. 특이한 별자리에 태어난 사람은 적당한 배우자를 찾기가 힘들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눈'이 맞느냐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퇴짜를 놓기도 한다. 이런 일반적인 관습에 비하자면 우리 결혼은 상당히 이례적인 행사였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던 내게 남편은 이상형이었다. 그래서 정말 눈에 뵈는 것 없이 저돌적으로 결혼을 추진한 것도 나였다.

결혼 후 한동안은 내 삶 속에 꿈이 다 들어 있었다. 그것은 언어의 미묘한 경계가 흐려진 영어와 한국어와 말라얄람 사이에서 내가 터득한 생존법, 환상이었다. 그때는 꿈이 내게 와 있었다. 그리고 꿈꾼 데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 사람을 본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사람을 투영했던 것이다. 내 환상과 싸우기 위해 지독히 싸우고, 죽도록 아프고 끝없이 슬픈 뒤, 옆을 돌아봤을 때 처음처럼 프라사드가 옆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진 행복을 서로 나누는 것이 행복한 관계임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끝난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용감하다. 우리 삶은 되는 대로 내맡긴 채 이끄는 대로 걸어왔다. 그럼에도 이 지구는 우리가 없으면 완전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구 메고 떠난 남인도 문화기행'으로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을 채우게 되었다. 이 기행문을 쓰게 한 동기는 인도 초행길인 언니와의 동행이었다. 초심자와 안내자가 만나 빚어내는 시각의 충돌을 글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인도라고 했을 때 흔히들 '골든트라이앵글'이라고 말하는 북인도 일부 지역의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떠올린다.
칼라만달람의 어린 동기들 모습.
반면 남인도 문화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남인도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와 사람을 알리고 싶었다. 다채롭고 이색적인 다른 전통문화를 보며 우리 문화의 색과 모양을 다시 되새기고 보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오는 의미로서의 한류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 색깔과 가치가 눈덩이처럼 바깥으로 굴러가 세계 속에서 그 색을 퍼뜨리기를. 그래서 세상을 더욱 밝고 다채롭게 만드는 한류가 되기를 원한다.

내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에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자판 앞에 앉은 지금 마치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오르기라도 한 듯 감사한 분들 이름을 되뇌어 본다.

내 시각의 사각지대를 메워주던 프라사드, 허술한 글자를 읽어 비로소 글이 되게 만들어주신 독자들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던 칼라만달람 어린 동기들의 커다란 호기심 어린 눈망울, 몇 년 전 가르쳐준 "엄마가 섬그느레~"를 기억하는 소년, 온몸의 피를 역류시키는 첸다 소리와 그에 맞춰 추던 카타칼리 실전수업 줄리야탐, 심금을 울리며 내 영혼까지 정화시키던 아름다운 노랫소리…. 사람들에게 사랑 어린 미소를 보낸다. 고맙습니다. -끝- ttapp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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