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춘문예-단편소설] 문어 /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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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놈은 항상 에어스톤 부근을 얼쩡댄다. 위로 솟구치는 공기방울에 다리 두어 짝을 띄워놓거나, 아니면 에어스톤을 통째로 끌어안고 있다. 자잘한 공기 방울들에 파묻혀 누두를 불룩대고 있으면 언뜻 태평스럽기도 하다. 한데도 놈은 항상 희멀겋다.

상철이 슬쩍 손님 동태를 살핀다. 겨드랑이에 손가방을 끼운 여자는 입 벌린 대합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가 빼기를 반복하고 있다. 놀란 대합이 짠물 뱉으며 오므리는데 여자는 오히려 입술을 실룩대며 재미있어한다.

수족관에 손을 넣고 놈을 움켜잡는다. 희멀건 주제에 빨판 힘은 제법이다. 손이 묵직하도록 잡아당겨도 짤막한 다리 한 짝은 여전히 바닥에 붙어있다.

"아저씨. 걔는 다리가 이상하잖아요."

"아, 그렇죠? 제사에 쓸 건데."

슬그머니 놈을 놓아준다. 놈은 황망한 와중에도 짤막한 다리 하나를 휘두른다. 상철의 시선이 자꾸만 짧은 다리에 모아진다. 가운데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도망치는 얄미운 모습이다. 상철은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던 다른 놈을 끄집어낸다. 비슷한 덩치에 불그레한 문어다. 왁살스럽게 건져진 놈이 사방으로 다리를 뻗댄다. 벌겋게 화가 난 대가리, 상철은 그 대가리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는다.

수영 모자 뒤집는 것과 똑같다. 한번 뒤집으면 혼자 힘으론 돌아올 수 없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내장이 풍선처럼 밀려 나온다. 의외로 질긴 것들이다. 한 움큼 뜯어낼 때마다 턱 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문어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할퀴지도 않는다. 그저 발버둥이다. 발버둥 칠수록 억세게 뜯어낸다. 심장과 소화기관, 쪼그라든 먹물 주머니까지 뜯어낸다. 다리 힘은 여전히 억세다. 여덟 개 다리를 휘두르며 발악한다. 손님이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흥미롭다는 얼굴이다. 왼쪽 눈을 살짝 일그러뜨리고 낱낱이 지켜본다.

손질에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 실수조차 의도된 행동인양 능숙하게 손질해야 한다. 먹물을 터뜨리거나 어설프게 문어 다리에 휘감겨서도 안 된다. 상철은 손질한 문어를 헹군 다음에 소쿠리에 옮겨 담는다.

"두 마리…."

여자가 뾰족하게 내민 입술로 조개를 가리킨다. 좀 전에 짠물을 갈겼던 놈이다. 상철은 그 놈을 집어 든다.

껍데기 안쪽에 칼을 바싹 붙여서 쑤셔 넣는다. 엄지에 힘을 보태자 두터운 관자가 단번에 잘린다. 칼날이 오른쪽으로 한 번 더 스치고 살색 덩어리가 철썩 떨어진다. 조갯살은 통통했다. 대합 두 마리를 까낸 상철이 홍합 소쿠리에 손을 얹는다. 시선은 여전히 여자를 향해 있다. 여자는 입술을 우아하게 벙긋거린다. 벙긋거리며 목이 아픈 시늉도 한다.

상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홍합 다섯 마리를 골라낸다. 입 모양으로 알아챈 게 아니다. 엄마 수첩에 적혀있어서 안다. 그 집이 왜 연탄집인지, 저 아줌마가 왜 새댁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음력 9월 10일은 연탄집 제삿날이다. 수첩엔 암호 같은 글씨로 문어 중짜, 오징어 2, 새우 1, 대합 2, 참담치 5, 군소 5라고 적혀있다.

홍합은 대합보다 까기 어렵다. 헤프게 입 벌리지도 않는다. 껍데기 사이에 칼을 대고 힘껏 찔러야 한다. 그것도 껍데기 안쪽에 바싹 붙여 관자를 끊어내야 한다. 한 번에 해내지 못하면 이리저리 들쑤시게 되고 그 와중에 입술이 끊어지기 십상이다. 그렇게 배웠다.

엄마는 홍합 살 테두리를 입술이라 불렀다. 가마이 놔뚜라. 그래야 주디를 사알 벌린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땐 입을 열지 않았다. 한눈팔고 있다가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입을 벌리고 있곤 했다. 상철은 칼끝으로 새카만 입술을 뒤집어 보기도 했다. 겨우 홍합일 뿐인데 반들반들한 입술과 그 안쪽의 불그스레한 속살이 야릇했다. 그 안에 뭐시 있나? 엄마는 뭘 보는지 다 안다는 투로 물었고 고등학생이었던 상철은 공연히 부끄러웠다.

함부로 입 벌리지 않는 홍합이 왜 그리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쉽게 몸을 여는 조개는 청순하기만 한데, 홍합은 일부러 드러낸 속살처럼 야했다. 상철은 입술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며 홍합 살을 비닐봉지에 담는다.

"8만 5000원요."

2000원을 빼준 금액이다. 여자가 새삼 얼굴을 찡그린다. 아주머니 같았으면 1만 원은 더 깎아줬을 거라고 불평한다. 엄마라면 정말 어쨌을까 떠올리며 실없이 문어를 한 번 더 헹군다. 어제 왔어야 할 제사 손님이 오지 않았던 것도 맘에 걸린다. 상철은 짐짓 졌다는 시늉을 하며 5000원을 더 에누리해준다.

여자가 그제야 지갑을 연다. 손가락 끝엔 해물 체액이 묻어있다. 여자는 끄집어낸 지폐로 손가락을 닦는다. 상철은 가만히 기다리며 큐빅이 박혀있는 여자 손톱을 구경한다. 구경하며 콧물을 치륵, 빨아들인다. 지폐들이 서로 들러붙은 채로 상철에게 건네지고, 상철은 지폐를 한 장씩 떼어내며 다시 헤아린다. 다 헤아리고 고개를 드니 여자는 벌써 골목 저쪽을 빠져나가고 있다.

상철은 휴대폰을 눌러 시간을 확인하고 엄마 수첩을 펼쳐본다. 오늘 날짜를 넘기고 그 뒷장도 넘겨본다. 서로 들러붙은 종이가 자꾸 뭉텅이로 넘겨진다.

"1805호 제사. 9월 14일."

중얼거리며 큰 글자 아래까지 읽어본다. 1805호는 예전에 직접 배달해 준 적이 있는 집이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수첩을 전대 속에 넣고 고무장갑을 다시 낀다.

오징어 상자에 얼음을 채우고, 홍합이 담긴 소쿠리는 마대로 덮는다. 새우 상자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린다. 변색된 놈이 보이고 꼬리 빛깔도 거뭇하다. 대가리가 떨어진 놈도 있다. 떨어진 대가리 속엔 누런 덩어리가 고여 있다. 상철은 한 마리 집어 껍질을 까본다. 껍질이 흐물흐물해도 알맹이는 말끔하다. 킁킁 냄새 맡아보던 상철이 새우상자를 통째로 냉장고에 넣어버린다.

엄마는 종종 팔다 남은 해물을 집에 가져왔다. 해물을 씻어 안치고, 마늘장아찌 담아내고, 김치를 썰기 시작하면 온 집안에 냄새가 퍼졌다. 역겨운 냄새는 바지락 국 끓일 때도, 꽃게탕 끓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진짜 상한 것은 다 골라냈다고 변명했다.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었다. 해물을 씹다가 뱉는 일은 수시로 반복되었다. 상철은 이제 팔다 남은 해물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습관처럼 코를 빨아들인다. 죽은 조개와 오징어 내장, 그리고 오래된 새우를 섞어놓은 냄새다. 상철은 코를 킁킁대며 벗은 바지를 신발장 옆에 걸고 소맷부리를 탁탁 털어낸다.

집에 밴 악취를 없애고 싶었다. 제일 먼저 신발장 옆에 걸려있던 엄마 몸빼바지부터 없앴다. 효과가 전혀 없었다. 다음 용의자는 안방 앉은뱅이책상 아래에 놓여있던 전대였다. 엄마는 전대를 세탁하지 않았다. 끈적이는 지폐가 들락거리던 전대에선 특유의 돈 냄새와 해물 비린내가 풍겼다. 상철은 그 전대를 비닐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나 냄새는 여전했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안방 문틈으로 실 끈 같은 빛이 새어 나온다. 조용히 문을 열자 훅하고 구린내가 치민다. 상철은 변기통부터 찾아 두리번거린다. 변기는 서랍장 옆으로 옮겨져 있다. 통 안은 깨끗했다. 센터에서 파견 온 간병인이 씻어놨을 것이다.

킁킁대며 여기저기 탐색하던 시선이 앉은뱅이책상에서 멈춘다. 반듯하게 눕혀놨던 책에 누런 얼룩이 스며들어있다. 엄마가 평소 연습장에 베껴 쓰던 불경 책이다.

엄마는 틈틈이 글자를 옮겨 적곤 했다. 굳은살이 박인 손아귀에서 볼펜은 삽자루처럼 따로 놀았다. 건들거리며 지켜보던 상철은 피식 웃었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이기 무슨 말인중 알고 썼는교? 엄마는 홍합 까듯 입술을 깨물고 끝까지 손을 놀렸다. 마치 그림 그리듯이 길게 긋고 네모를 그렸다. 그렇게 글자를 완성시킨 다음에 상철을 올려 봤었다. 이기 치매 예방에 좋다데?

엄마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턱이 반쯤 벌어져 있고, 눈꺼풀도 살짝 열려 허연 흰자위가 초승달처럼 비친다. 정신을 놓은 것인지 잠을 자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른손엔 여전히 손수건이 쥐어져 있다. 손수건 자락에도 누런 얼룩이 묻어있다. 끝을 잡고 살며시 잡아당기자 맥없이 빠져나온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손수건으로 바닥 닦고, 또 그것으로 눈물을 닦았다. 무엇에 슬퍼해서 나온 눈물이 아니었다. 그냥, 재워둔 해삼처럼 녹아내리는 물이었다. 상철은 겅중겅중 발끝걸음으로 엄마 방을 빠져나온다.

보온밥통 뚜껑을 배꼼 열어보고 털썩 앉는다. 맞은편 꽃무늬 벽지에 잠시 시선을 놓더니 벌떡 일어나 숟가락을 챙긴다. 밥을 옮겨 담는 숟가락에서 밥알이 부스스 떨어진다. 밥통을 기울이자 밥 덩이가 구르며 모여든다. 상철은 담아낸 밥그릇에 물을 조금 붓고 전자레인지에 집어넣는다.

밥은 아주 뜨겁게 데워졌다. 숟가락으로 가운뎃부분을 후비고 날계란을 깨어 넣는다. 버터 한 숟갈 떠 넣고 간장도 붓는다. 노른자를 터뜨려 비비기 시작하자 밥알이 노랗게 물든다. 고소한 냄새가 번지자 비로소 식탁에 몰려있던 비린내들이 물러난다.

두어 숟갈 떠먹던 상철이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헐렁한 공간에서 밀폐 용기 하나를 꺼낸다. 뚜껑을 여니 김치는 없고 검붉은 양념만 묻어있다. 뚜껑을 닫고 다시 밥을 씹는다. 기계적으로 우무적거리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다. 냉장고에 붙은 할인 쿠폰, 벽지의 모기 자국, 각질 허옇게 인 뒤꿈치 따위를 더듬던 눈동자가 달력에 와서 멈춘다. 덩달아 턱 놀림도 멈춘다. 숫자 13 밑에 '영미생일'이라 쓰여 있다. 멈췄던 턱 놀림이 갑자기 빨라진다. 입 안의 것 삼키기도 전에 두 숟갈을 연거푸 퍼 넣는다.

카페 프시케 앞에서 상철이 머뭇거린다. 셔츠를 당겨 겨드랑이 냄새를 맡고, 손톱에도 코를 대어본다. 비누로 몇 번이나 씻었는데도 냄새가 남아있다. 하지만 손에 든 자그마한 쇼핑백은 그 자체로 향기롭다. 아주 유명한 제품이라 했다. 종업원이 그랬다. 광고 못 보셨어요? 마릴린 먼로가 썼다는 향수. 누가 이렇게 묻잖아요. 잘 때 뭐 입으세요? 그러니까 여자가 이렇게 대답해요. 저는 잠잘 때 이 향수를 입고 자요. 종업원은 손 위로 향수병을 반듯하게 올려 보였고 상철은 눈꺼풀을 세 번쯤 끔벅거렸었다.

카페 안은 냄새가 다르다. 플라스틱 냄새 같기도 하고, 화장품 냄새 같기도 하다. 양주에서도 비슷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막 퇴근한 영미에게선 더 진한 냄새가 났다. 상철이 코를 과장스럽게 킁킁대면 영미는 절대 취하지 않았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렇게 장난칠 때 영미는 웃고 있었고, 숨결도 달콤했었다.

상철을 봤을 텐데 영미는 아는 체를 않는다. 입술만 굳게 다물 뿐이다. 공연히 앞에 앉아있던 손님이 힐끗 돌아본다. 상철 눈은 때마침 손님 손을 더듬고 있던 중이었다. 어두운 조명에도 빛을 발하는 시계에 딱 어울리는, 아크릴처럼 투명한 손이었다. 상철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웃으며 쇼핑백을 뒤로 감춘다.

"오백하나랑…."

상철이 표 나지 않게 곁눈질하더니 조금 목소리를 높인다.

"과일 하나."

"과일요?"

영미가 의외라는 듯 되묻더니 이내 맥주잔을 꺼내 능숙하게 돌려 잡는다. 생맥주 콕 아래로 잔을 비스듬히 대고 레버를 젖히자 노르스름한 액체가 빙그르르 돈다. 맥주가 차올라도 거품이 일지 않는다. 그냥 노랗기만 하다. 배를 문질러가며 받아냈던 엄마 소변과 똑같다. 영미 눈동자가 힐끗 상철 얼굴을 스친다. 영미는 받아낸 맥주를 보란 듯 쏟아버리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500cc 유리잔을 꺼낸다.

"재워둔 맥주는 첫 잔을 빼내도 맛이 없어요."

영미는 새로 채운 생맥주를 상철 앞에 놓는다. 그러나 시선은 맞은편 손님에 닿아있다. 손님은 상철 때문에 중단된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니까, 가장 이상적인 남녀관계를 연구한 결과가 뭐냐 하면 말이야. 응?"

정수리 벗겨진 손님이 영미에게 자꾸 응? 응? 하며 다그친다.

"젊은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와 짝을 맺는 거야. 성적 경험과 경제적 조건을 다 갖춘 남자 말이야. 그렇게 살다가 남자가 늙어 죽으면 여자가 모든 것을 물려받지. 그다음에 곧바로 숫총각과 재혼하는 거야. 젊은 남자는 성숙한 여자에게서 경험을 얻고 사회적 기반을 닦는 거지. 어때? 합리적이지 않아? 응?"

상철도 곰곰이 생각해본다. 영미가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해하며 영미 입술을 훔쳐보기도 한다.

"좀… 징그럽네요."

영미 대답에 손님이 뻘쭉 웃는다. 웃으며 영미 가슴을 향해 손가락을 꾹 지른다. 허연 손가락이 놀랍도록 길다. 상철 눈매가 짐짓 사나워진다.

"징그럽다고? 니가 아직 한참 어리구나."

상철이 처음으로 손님 얼굴을 노려본다. 손님도 벙글거리는 얼굴로 마주 본다. 마주 볼 뿐 아니라 양주잔 치켜들어 건배하는 시늉까지 한다. 희한하게도 희끗한 머리칼, 번드레한 입술이 그의 반짝이는 시계와 어울린다.

상철이 몰래 마른 침을 삼킨다. 영미를 향해 흘깃대며 또 한 번 침을 삼킨다. 주책없이 움쭉대는 목울대에 영미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목격한 여자처럼 입술에 힘을 준다.

영미 말대로 하룻밤 재워둔 맥주는 맛이 없었다. 운 없는 손님이 김빠진 맥주를 처리해 준다면 누군가는 새 통의 신선한 맥주를 마실 것이다. 오늘 밤 재수 없는 손님은 바로 자신이었다. 얼마나 더 마셔야 생맥주 통이 비워질지 알 수 없다. 영미는 자꾸 김빠진 맥주만 갖다 준다.

유난히 뜨겁게 안겨왔던 날이 있었다.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내고 일주일쯤 지난날이었다. 술기운에 던진 말이었지만 헛말은 아니었다. 진짜로 살림을 합칠 생각이었다. 영미 입술은 발갛게 부풀어있었고, 그녀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우리… 혜정이 데려오면 안 돼?"

상철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영미는 지레 목소릴 높였다. 계모 손에 죽은 아이 뉴스 봤어? 그런 나쁜 년이 어디 있어? 욕을 하다가, 요즘 혜정이가 자꾸 꿈에 나온다며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도 했다.

상철은 말없이 담배를 당겨와 입에 물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같이 담뱃불을 붙였을 텐데 홑이불로 가슴을 여민 영미는 상철 입만 빤히 올려봤다.

"걔, 저거 아버지랑 잘살고 있다며?"

"자알 살아? 인간 같은 애비였으면, 내가 이 짓 하고 있겠어?"

앙칼진 영미 말투에 상철 턱에까지 힘이 들어갔다. 상철은 악문 이로 담배를 한 번 더 빨아들이고 연기와 함께 짜증을 뱉어냈다.

"지금 우리 형편에 아를 대꼬와서 우짤라고? 지금 어무이도 저 꼴인데…."

상철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고, 상철을 노려보던 영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후로 영미는 반듯한 얼굴로 존댓말을 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사정해도 영미는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고 깍듯하게 높임말을 했다. 저에게 하실 말이 아직 남았나요? 덕분에 존댓말이 이렇게나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도 상철에게 존댓말을 했다. 엄마는 현관문 들어서는 상철을 와락 붙잡고 뜬금없이 미안해했다. 아이고, 우짜꼬. 이래 일찍 오셨네. 쫌만 기다리소. 인자 밥만 안치면 됩니더. 그래놓고 화장실에 털썩 주저앉아 웅얼거렸다. 엄마 눈동자는 허공의 누구와 바삐 만나는 듯이 불불 날아다녔다. 다행인 것은 조금 시끄럽기는 해도 참으로 얌전한 치매에 걸렸다는 것이다. 엄마는 조용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에는 아기가 되어버렸다.

"영미야."

상철이 영미와 시선을 맞추려 애썼지만, 영미는 대답 대신 비워진 잔을 치운다. 글라스 냉장고에서 꺼낸 새 잔은 금방 뿌옇게 흐려진다. 영미는 생맥주 콕에서 잔을 멀찍이 떨어뜨려 억지로 거품을 만들어냈다.

"영미야."

이번엔 맥주잔 거품을 핥으며 불렀지만, 영미는 몸을 돌려 손님 양주잔에 얼음을 채워준다. 상철 잔이 빠르게 비워졌다. 영미는 맥주잔을 바꿔주고 얄팍한 김 몇 조각도 내준다. 연거푸 잔을 비웠지만 상철은 결국 새 맥주통의 맥주를 맛보지 못했다.

프시케를 나선 발걸음이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계속 이어진다. 창백한 얼굴이 편의점과 커피전문점 유리창에 붙어 울렁울렁 헤엄친다. 유리를 타고 흘러가는 제 모습을 쫓아가던 상철이 길게 숨을 내쉰다. 희한하게 일그러졌다가 저만치서 휘리릭 나타나는 놈의 분신술을 따라잡기 힘들다. 놈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발걸음이 흔들린다 싶더니 노래방 입간판 앞에서 멈춘다. 짧게 들이마신 호흡이 목구멍에 걸리자마자 울컥 토사물이 쏟아져 나온다. 쇼핑백에 토사물이 튀자 가슴에 안고 다시 토한다. 상철은 맨홀 구멍으로 빠져드는 거품을 구경하며 입을 항문처럼 뻐끔거린다. 목줄을 몇 번 더 꿀쩍거리고 몸을 일으킨다. 걸음걸이가 로봇처럼 어색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식탁에 놓인 우유를 들이킨다. 그러나 이내 뱉어버린다. 싱크대 수돗물로 입을 헹구고 냉장고 문을 연다.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퀴퀴한 기운이 얼굴에 닿는다. 상철은 그제야 전원선 뽑아버린 것을 기억해낸다.

이상한 소리가 났다. 유난히 큰 모터 소리뿐만 아니라, 헐거워진 뭔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 거기에 꾸르륵대는 괴상한 소리까지 겹쳐졌다. 그러다가 예고 없이 뚝 그쳤다. 방심하기 알맞은 정적이 흐른 후, 냉장고의 괴성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상철은 이틀 밤을 견뎌내다가 결국 전원을 뽑아 버렸다. 거슬리는 기계음 때문이 아니었다. 소음 사이의 초조한 적막 때문이었다.

엄마의 정적은 비명 지르기 직전의 숨 고르기였다. 독수리에게 쪼인 거인의 간이 새로 돋아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제든 욕설 섞인 신음이 터져 나올, 그런 예고 없는 정적은 그저 무섭기만 할 뿐이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는 상철 발걸음에서 쩍쩍, 소리가 난다.

나지막하던 코골이 소리가 어제보다 더 두껍게 들린다. 엄마는 원래 코를 골지 않았다. 이등병이었던 상철을 면회하고, 닭 두루치기 먹이고, 강원도 화천 어느 여관방에 나란히 누웠을 때에도 엄마는 코를 골지 않았다. 엄마를 가만히 내려 보던 상철이 엄마 코를 슬쩍 잡는다. 손가락으로 좌우로 흔들어보더니 킥, 웃는다. 코는 다 녹아내린 얼굴에서 유일하게 오뚝했다.

해골 같은 얼굴을 빤히 내려 보더니 엄마 옷깃 사이로 손을 넣는다. 앙가슴 한쪽으로 물컹한 것이 만져진다. 다 비워낸 먹물 주머니나 다름없다. 물기가 없어 까슬한 인비늘까지 느껴진다. 가죽 아래로 두드러진 가슴뼈도 만져진다. 뼈는 숨 쉴 때마다 삐걱거리며 남은 숫자를 헤아린다. 엄마 가슴에서 손을 떼고 이불을 젖힌다. 느슨하게 채워진 기저귀 사이로 골반 뼈가 불거져있다. 흘러내린 뱃가죽에는 마약 성분의 패치도 붙어있다.

두리번거리던 상철이 앉은뱅이책상 밑에서 물티슈와 기저귀를 꺼낸다. 새 기저귀를 펼쳐놓고 엄마 기저귀를 푼다. 기저귀 안쪽엔 거무죽죽한 변과 함께 검붉은 피도 묻어있다. 아직도 나올 변이 있는지 신기하다. 요 며칠 엄마 뱃속에 들어간 것이라곤 약간의 물밖에 없다.

상철은 두 번째 간병인이 그만둔 그날부터 유동식마저 먹이지 않았다. 엄마는 욕설을 퍼붓다가 아야, 아야 하며 신음했다. 이틀 전부터는 힘없이 웅얼거리다가 코 골며 잠만 잤다. 이젠 간병인이 유동식을 떠먹이려 해도 먹지 않는다. 새로 온 간병인은 알 턱이 없다. 잠만 자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굵고 짧은 치매였다. 상철을 아버지로 착각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대변 묻은 속옷이 빨래걸이에 걸리고, 갓난아기처럼 웅얼거리기까지 불과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속옷에 피가 묻은 것도 그저 치질이 심해진 거로만 알았다. 치질 고치러 갔던 병원에서 상철을 앉혀놓고 정중하게 깨우쳐줬다. 직장암입니다. 전이가 다 된 상태로 어르신 체력을 감안하면 어쩌고저쩌고 어지러운 말로 설명했다.

퍼져있던 암세포들은 지리기 일쑤였던 오줌 통로도 막아버렸다. 엄마는 더 이상 오줌을 지리지 않았다. 오히려 불룩한 아랫배를 문질러 빼내야 했다. 슬슬 마사지하면 어렵잖게 흘러나오는데, 엄마는 공연히 몸을 틀며 할근거렸다.

덕분에 그리워했던 남편뿐 아니라 양복입고 출근하길 소원했던 아들의 기억마저 배설해 버렸다. 아기처럼 변한 것도 잠시, 엄마는 결국 꿈틀대는 걸레가 되어버렸다. 그저 손수건으로 눈물 닦고, 싯누레진 천으로 방바닥을 문질렀다.

기저귀를 갈아주던 상철이 문득 사타구니를 살펴본다. 무릎을 세우자 말라버린 허벅다리가 맥없이 젖혀진다. 곳곳이 파이고 벗겨져 있다. 헐어 드러난 생살이 쭈그러진 피부에서 유일한 선홍색이다. 상철은 혀를 차며 서랍장 아래 연고 상자를 뒤적인다.

연고를 바르던 상철이 엄마 몸뚱이 한곳을 빤히 쳐다본다. 오래전에 자신이 통과했을 출구였다. 두 눈을 깜짝대며 한참 동안 쳐다본다. 이 좁아터진 문을 뭐하러 버둥대며 빠져나왔을까 되씹는다. 시커멓게 닫힌 그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상철이 물티슈를 뽑아 그곳을 닦는다. 문틈에 낀 곰팡이 닦듯이 구석구석 닦는다. 어름어름 닦던 상철이 갑자기 서러운 아이처럼 코를 쿠룩, 빨아들인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간다. 금방 돌아온 상철 손에 쇼핑백이 들려있다. 상철은 포장지를 뜯고 향수 뚜껑을 연다. 코를 갖다 대 깊게 들이마시고 하아, 소리 내어 뱉는다.

상철은 손바닥을 오므려 향수를 붓더니, 마치 광고 장면처럼 양 손바닥을 부딪힌다. "엄마, 이기 뭔중 아나?"

손바닥으로 엄마 사타구니를 톡톡 두드린다.

"이거 억수로 유명한 향수다."

왈칵 들이부은 손바닥에서 향수가 주르르 넘친다. 손등을 타고 내려와 엄마 아랫배에, 듬성한 음모에 떨어진다.

"누구는 암껏도 안 입고 이것만 입고 잔다카더라"

손바닥이 엄마 다리를 거쳐 발등까지 빠짐없이 훑어 내린다.

"와따매, 냄새 좋네. 엄마 직이제? 좋제?"

상철이 프흐흐으, 하고 요상한 웃음을 흘린다. 엉거주춤 엎드려 엄마 젖가슴에도 향수 묻은 손바닥을 두드린다. 바지 뒤춤 사이로 드러난 상철의 등허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있다.

자갈치의 새벽 공기는 소름 끼치도록 차갑다. 가끔 방송사에서 활기찬 삶의 현장을 취재한답시고 카메라를 들이댈 때 상철을 코웃음을 쳤다. 활기차? 여긴 바다 수백 미터 아래 심해다.

어릴 적엔 자갈치가 그냥 자갈치였다. 엄마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주전부리하고 엄마 손으로 발려주는 생선살로 밥 먹던 시절에는 말이다. 하지만 삶의 방편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갖은 핑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날부터는 이곳이 깊은 바닷 속으로 변해 있었다. 다리 잃은 문어는 살아갈 수 없는 곳. 이빨 날카로운 심해어가 시퍼렇게 불 밝히고, 대왕오징어와 고래가 싸우는 곳. 상철은 옷을 여미고 콧물을 킁, 빨아들인다.

36번 철호네에게서 오징어 세 박스를 주문하고, 61번 영진상회에서 냉동새우 대짜를 두 박스 주문한다. 공판장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흠칫 몸을 비켜선다. 해물 옮기는 수레바퀴가 발등 위로 올라탈 뻔했다. 수레에는 파란 플라스틱 통 두 개가 실려 있고, 그 속에는 문어가 그득하다. 상철은 수레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문어는 8번 영식이네 것이었다. 낙찰받은 물량이 많았다. 영식이네가 문어를 빨간 그물망에 옮겨 담기 시작하자 M모자를 쓴 남자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사진 좀 찍어도 되죠? 어떻게 이해했는지 영식이네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문어는 섞어놓으면 저희끼리 다리를 잘라 먹어. 어떤 놈은 제 다리도 잘라 먹는다니까.

영식이네는 문어 망을 산소 공급되는 물통에 풍덩 던지더니, 이번에는 통을 뒤적여 제일 큰놈을 끄집어낸다. 구경하던 남자가 이야, 감탄하며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댄다. 굵은 다리가 팔뚝을 휘감자 영식이네가 영차 하며 더 높이 들어 올린다. 연거푸 찍히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영식이네가 활짝 웃어 보인다.

상철은 마음을 바꿔 냉동 문어를 주문한다. 그간엔 일부러라도 살아있는 문어를 고집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바보짓이었다. 수족관 유지하는 비용도 만만찮고 문어가 죽어버려 본전도 못 챙긴 경우가 허다했다. 냉동 문어는 팔다 남아도 냉장고에 넣어버리면 그만이다.

아침 겸 점심으로 국수 하나를 시켜 먹을 때까지 시장은 한산했다. 구경하고 오가는 사람뿐이더니 오전 11시 넘길 무렵에서야 바지락 한소쿠리 팔았다. 그것도 생선 집 재봉이네에 외상으로 줬으니, 하얀 패딩 걸친 여 손님이 사실상 마수걸이였다.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하고 가버릴 줄 알았다. 한데, 여자는 수족관에 바싹 다가가 한참을 굽어봤다. 수족관엔 다리 잘라 먹은 놈까지 포함해서 문어가 세 마리밖에 없었다.

"싸게 해드릴게요."

무심하게 던진 말이었는데, 여자가 대뜸, 그럼 얼마에요? 하고 묻는다. 떨이로 엄청 싸게 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상철은 활짝 웃어 보인다.

문어는 수족관에서 건져지자마자 매달렸다. 다리 한 짝을 잃은 문어의 저항은 어설프기 그지없다. 상철은 대가리를 잡으며 고개를 과장스럽게 주억거린다. 다리 잘라 먹은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네 애원도 다 이해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가리 뒤집으려는 순간 먹물이 튄다. 차가운 먹물이 앞치마에서 얼굴까지 흩뿌려졌다. 뿜어낼 것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부 손에 잡혔을 때 뿜었을 것이고, 공판장에서 옮겨질 때 또 한 번 쏘았을 터인데 말이다.

손질을 멈추고 얼굴을 닦는다. 수건에 묻어난 얼룩이 핏물처럼 꺼림칙하다. 그러나 상철은 여자를 향해 웃어 보인다. 그 봐요, 문어가 이렇게나 싱싱한걸요. 하는 얼굴로 히죽 웃어 보인다. 하지만 젊은 여자는 상철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얗고 하얀 패딩에 먹물이 튀었는지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다.

썩 괜찮은 날이다. 싸게 팔기는 했지만 손해는 보지 않았다. 게다가 손님도 심심찮게 드나든다. 길 커피 아줌마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받았을 땐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후후 불며 머금은 한 모금 커피는 달콤하고도 따뜻했다.

마음이 풀어지니 머릿속까지 물렁해진다. 영미와 함께 저녁 찬거리 사러 가는 상상이다. 버섯이 귀엽다며 호들갑 떨 것이며, 생선 굽고 찌개를 끓일 것이다. 맛없어도 맛나다고 말하는 자신의 익살스런 표정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제수용 음식도 장만할 것이다. 상상이 거기까지 넘어가니 머리가 조금 어수선해진다.

영미는 제사상 차리는 집이 부럽다고 말했다. 진짜? 너 웃긴다. 시댁 제사라면 보통 질겁한다던데. 상철이 약간 흐뭇한 기분으로 물었고, 영미는 상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전부 모이잖아. 얼마나 좋아.

상철은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었다. 정작, 본인은 제사가 탐탁잖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사만 해도 그랬다. 학용품 하나에도 벌벌 떨던 엄마가 아버지 제사 땐 넘쳐나도록 차렸다. 그렇게 음식을 차려놓고는 넋두리하고 또 소원을 빌었다. 우리 상철이 공부 좀 잘하게 해주이소. 우리 상철이 정신 좀 차리게 해주이소. 손바닥 비비며 빌었지만 죽은 아버지가 엄마 소원을 들어줄 리 없다.

한마디 던져보기도 했다. 엄마! 우리, 제사상만 줄였어도 벌써 집을 한 채 샀겠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비슷했다. 그래도, 니를 이마이 키운 건 다 아부지 덕이다. 그윽하게 쳐다보며 그렇게 말해줄 때 상철은 왠지 가슴이 옥죄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오기처럼 끓어올라 허공을 향해 마구 닦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 맞다. 언제나 제물이 필요했지. 제사가 어디 죽은 사람만을 위한 제사였던 적 있었나. 제물을 어디 문어만 쓴다는 법이 있었나. 잘살고 싶을수록 더 귀한 것을 바쳐야 하잖아? 이런 푸념들만 가릉가릉 끓이곤 했다.

"보세요. 아저씨! 이게 뭐예요?"

어리둥절 돌아보다가 같이 서 있는 패딩 여자를 보고서야 누군지 기억해 낸다. 오전에 왔던 재수 좋은 손님이다. 패딩 손님은 한발 비켜서 있고, 노랑머리 아줌마가 대뜸 비닐봉지를 열어 보인다. 검은 비닐엔 벌겋게 익은 문어가 들어있다.

"아니, 어쩜. 이런 문어를 제수용으로 팔아요?"

제수용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언뜻 1805호라는 숫자가 스친다. 가만, 오늘이 음력 며칠이던가? 그러고 보니 저 아줌마도 낯이 익다. 패딩 여자의 시누이나 동서쯤 되려나? 상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줌마는 아예 판매대 위로 봉지를 뒤집어 놓았다. 문어는 영국 왕관처럼 멋지게 삶겨져 있었다. 다만 가지런히 말려 올라간 다리 하나가 짧아 마치 이빨 빠진 왕관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철도 할 말이 있다.

"그래서 싸게 드렸잖아요? 데쳐서 썰어 먹으면 맛있다고."

"어머머, 웃긴다. 아저씨가 언제 그랬어요?"

이번엔 패딩 여자가 도끼눈을 하고 나선다. 문어 잘못 사 왔다고 얼마나 눈총을 받았는지 오전과는 확연히 다른 얼굴이다.

"제수용으로 쓸 걸 알았으면 저도 그 물건 팔지도 않았어요.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때마다 여기 물건 팔아준 지가 몇 년인데, 제수용인지 아닌지도 몰라요? 응? 오늘 당장 제사 올려야 하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노랑머리 아줌마 가슴이 위압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흠칫한 상철도 눈썹을 치켜 올린다. 그러나 상철은 애초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자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꽂히고 사람들 시선이 우르르 몰려든다.

먹물을 뿜어야 할 때였지만, 상철이 뿌릴 수 있는 건 식은땀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다리 하나를 잘라내야 한다. 상철은 수족관에서 문어를 끄집어냈다. 문어는 또 발버둥 쳤고, 대가리는 쉽게 뒤집어졌다.

두 사람이 떠나자마자 판매대에 놓여있던 냉동 새우가 와르르 쏟아진다. 누군가가 몇 마리 집어 판매대 위에 올려주고, 누군가는 그냥 밟는다. 상철이 얼른 나가 바닥에 떨어진 새우를 줍는다. 겨우 두 마리를 집었는데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멈추지 않는 벨 소리에 다시 엉거주춤 일어서야 했다.

판매대 밑에 쪼그려 앉아 전화를 받는다. 목이 멨으나 가까스로 숨을 고른 다음에 여보세요 하고 말한다. 수화기 저쪽 목소리가 가파르다. 그러나 잘 들리지 않는지 수화기를 왼쪽 귀에 옮겨 댄다. 간병인 목소리가 분명하다.

"지금 바로 올 수 있는교? 어무이가 지금... 억수로 안 좋아요."

시커먼 먹물이 수화기를 통해 왈칵 쏟아진다. 엄마에게 여기도 상황이 안 좋다고 마구 떼쓰고 싶다.

"숨을 놔뿌린거 같은데... 하이고, 우짜노. 119 부를까예?"

상철은 아무 말 없이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는다. 얼굴은 기이하게 무표정하고 그동안 눈이 네 번쯤 깜박인다. "아입니더, 쫌만 기다리 주이소. 제가 지금 바로 갑니더."

상철이 몸을 일으킨다. 골목 끝쪽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쓸려가고 있다. 여덟 개, 열여섯 다리들이 서로 뒤엉켜 꿈틀대고 있다. 한두 개 먹혀도 재생될 다리였고, 당장 배고픔을 위해 잘려나가는 아픔 쯤은 감수할 사람들이다.

상철은 짓밟힌 새우를 쓸어 쓰레기통에 쏟아버린다. 널브러져 있던 문어를 비닐에 담고 새우는 새 박스를 뜯어 챙긴다. 손놀림이 점점 빨라진다. 홍합도 큰 것으로 세 마리 까고, 오징어와 소라를 손질해서 봉지에 담는다. 상철은 허리를 펴고 판매대를 살펴본다.

바지락조개를 면밀히 둘러보는 눈이 개운치 않다. 죽은 놈 몇 개를 골라내더니 결국 소쿠리를 번쩍 들어 올린다. 쓰레기통에 떨어지는 바지락 소리가 얼음처럼 얼얼하다.

실없이 부산떨던 상철이 돌연 꼼짝을 않는다. 가느스름히 뜬 눈도 허공에 굳어있다. 뻣뻣한 눈동자가 습기로 흐릿해지자 비로소 그의 왼손이 조금씩 움직인다.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누른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한참이나 기다린다. 잠시 후 다시 재발신 버튼을 누른다. 바싹 붙인 귀 사이로 통화 연결 음악이 새어 나온다.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무르춤하게 선 상철이 코를 쿠륵, 빨아들인다. 시선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시장 안을 맴돈다. 발갛게 핏발선 눈동자가 문득 수족관에서 멈춘다. 수족관엔 문어 한 마리가 누두를 불룩대며 숨 쉬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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