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춘문예-희곡] 달팽이의 더듬이 / 양예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등장인물 나대로, 아내, 여자 사람1, 2, 3 경찰

때 현재

장소 집안과 공간



무대

나대로의 집안이 기본 무대. 방 두 개에 거실 소파. 집안 내부는 구체적이지 않아도 된다. 문은 없어도 문을 여는 연기를 하면 방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게 하면 된다. 이것은 집안과 공간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한 설정이다.



1. 현실의 밤

밤. 나대로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노래를 부른다.

나대로 :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나대로 가로등 아래에 선다. 환한 빛을 올려다본다.

나대로 : 안녕, 날 비춰주는 너. 큰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구나. 고맙다 친구. 너는 나를 늘 위로해주니까.

나대로 집으로 향한다.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에 들어선다.

나대로 : (노래) 좁은 욕조 속에 몸을 뉘었을 때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줬어.

아내 : (방에서 나오며) 노래 좀 부르지 마. 다 들려.

나대로 :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도 노래는 아름다운 거야.

아내 : 그러면 다른 노래를 부르던가. 매일 똑같은 노래 지겹지도 않아?

나대로 : 패닉의 노래가 어때서? 패닉, 패닉, 아주 좋은 이름이야.

아내 : 네가 그러니까 패닉이 된 거야.

나대로 : 됐어.

아내 : 회사 들어간 게 8년 짼 데 아직도 과장이니.

나대로 : 됐다고.

아내 : 입사 동기들 다 승진했는데 만년 과장이니 패닉일 수밖에.

나대로 : 달팽이는 느리지만 정직해. 자기의 길을 긍정하면서. 난 그게 좋아.

아내 : 그래 평생 느릿느릿 찐득찐득한 바닥에 기면서 살아, 이 인간아. 말을 말아야지.

나대로 : 나 좀 안아줘. (다가간다)

아내 : 씻고 빨리 자. (손으로 얼굴을 민다)

나대로 나자빠진다. 아내 방으로 들어간다.

나대로 : 달팽이 한 마리가….

아내 : 나대로! 씻고 자라고! (방문을 쾅 닫는다)

나대로 : 달팽이, 달팽이 한….



2. 현실의 꿈

공간. 사람들이 성 담 벽의 돌을 올리고 있다. 담 벽 안에는 내실이 있다. 내실은 객석에 보여야 한다. 한 여자가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아 있다. 나대로 그곳으로 간다. 담 벽 돌을 들어 함께 쌓아 올린다.

사람1 : 이놈의 담 벽 쌓기는 끝이 없고만.

사람2 : 일은 고되고 저축은 못 하고.

사람3 : 세금은 오르고 지갑은 달라붙고.

나대로 : 팍팍한 삶엔 술 한 잔이 위로죠.

사람1 : 날마다 푸념해 봤자지.

사람2 : 들으려고 하는 놈이 도통 없으니.

사람3 : 벽이 너무 견고하고 단단해.

나대로 : 이건 누구의 성벽이죠?

사람1 : 공주님.

사람2 : 아니, 왕비님.

사람3 : 들리는 말로는…(서로 속닥속닥).

나대로 : 알 수가 없어 답답해요. 숨통을 열어보자고요.



나대로 가운데 벽돌을 빼내려 한다. 사람들 힘을 합해 벽돌 한 장을 빼낸다. 공간이 나타나자 그곳에 시선을 모아 내부를 들여다본다.

여자 : (뒤돌아 앉아 거울을 향해)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사람들과 나대로 서로를 쳐다본다.

여자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정적.

여자 : (하이 톤으로)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냐고 했다!

(소리) : 그야, 공주님이 가장 아름다우시죠.

여자 안심이 된 듯 거울을 보며 얼굴을 만진다.

사람1 : 거울이 말을 한 거야?

사람2 : 누군가 숨어서 들려준 거 같은데.

사람3 :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화답을 했는지도.

나대로 : 어쨌든 듣고 싶은 말을 들었군.

사람1 : 근데 저 여자가 군주야? 공주야?

사람2 : 공주로 살아간다는 얘기가….

사람3 : 설마 잔혹 동화 얘기는 아니겠지?

나대로 : 공주인지, 마녀인지, 왕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 성 밖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고 있는 거예요.

사람1 : 우리가 원하는 건 현명한 군주 아닌가.

사람들의 말이 여자의 귀에 들린다. 여자 자리에서 일어나 벽의 구멍으로 다가가 얼굴을 들이댄다. 사람들 놀라 나뒹군다. 그대로 달아난다. 나대로 느린 달팽이가 되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대로 : 가, 같이 가요. 우, 우리….

바닥의 끈끈한 점액질이 그의 몸뚱이를 붙잡는다.



3. 꿈과 현실 사이

밤 시간. 나대로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타난다. 휘청거리며 노래 부른다.

나대로 :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고개를 든다.

나대로 : 여, 친구. 이 늦은 밤까지 나를 기다린 거야? 저 큰 눈을 뜨고서 말이야. (잠시) 외롭니…? 난 외롭지 않다. 오직 날 위해 불 밝히는 네가 있어서… 따듯한 친구….

나대로 가로등 아래에 주저앉는다. 기둥에 등을 대고 눈을 감는다. 잠시 후 사람1이 다가와 나대로를 흔든다.

사람1 : 나 선생님.

나대로 :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사람1 : 준비는 되셨겠죠?

나대로 : 그럼요.

사람1 : 정보를 하나 알아냈어요.

나대로 : 뭔데요?

사람1 : 입이 두 개가 있대요.

나대로 : 입이 두 개.

사람1 : 뒷목에도 입이 있어서 몰래몰래 엄청난 것들을 삼켜버렸대요.

나대로 : 그렇군요. 안 보이는 부분을 잘 살펴야겠군요.

사람1 : (중절모를 씌워주며) 그럼, 꼭 성공하세요. (간다)

나대로 : (코트 깃을 올리고 중절모를 눌러쓴다) 입이 두 개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이 해먹은 거야? 괴물이 따로 없군.

나대로 주변을 관찰한다. 사람2 다가온다.

사람2 : 나 선생님, 정보가 있어요.

나대로 : 예.

사람2 : 팔이 여섯 개래요. 평소에는 두 개지만 은밀한 자리에서 팔이 네 개가 더 나온대요.

나대로 : 흠…. 그 많은 손으로 많이도 긁어모았겠군.

사람2 : (권총을 쥐여주며) 그럼, 꼭 성공하세요. (간다)

나대로 : (권총을 잡아보고 코트 안주머니에 넣는다) 평소에는 두 개, 그늘 속에선 여섯 개. 타깃이 쉽지 않겠어.

나대로 주변을 경계한다. 사람3 다가온다.

사람3 : 나 선생님, 정보가 있어요.

나대로 : 네.

사람3 : (귀엣말)

나대로 : 정말이요?

사람3 : 확실해요.

나대로 : 그, 그럼 어떻게?

사람3 : 그게 곤란하긴 한데…. (귀엣말)

나대로 : 예 알겠습니다.

사람3 : (뭔가를 쥐여준다)

나대로 : 뭡니까?

사람3 : 핫 팩이에요. 날이 추워졌어요. 그럼. (간다)

나대로 : 아. 항문이 두 개라니. 믿을 수 없군. 하긴 엄청 쓸어 모으고 엄청 처먹었으니 엄청 쌀 수밖에. 놈한테서 분명 고약한 냄새가 풍길 거야.

나대로 주변을 살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여자의 형체. 나대로 집중해서 주시한다. 경찰이 나타난다.

경찰 : 안녕하십니까. 중부경찰서 정보과 경위입니다. 잠시 불심검문을 하겠습니다. (나대로의 옷을 뒤져 권총을 꺼낸다) 이게 뭡니까?

나대로 : 그, 그건….

경찰 : 대한민국에서 모든 총기는 불법입니다. 같이 가주시죠.

나대로 : 이건 단순한 총이 아니라 내가 부여받은 시대의 의무요.

경찰 : 총기 거래, 휴대, 보관 모든 게 불법이에요! 가서 얘기합시다.(강제로 연행한다)

나대로 쓰러져서 바닥에 착 달라붙는다. 굼뜨게 기며 버틴다. 경찰 떼어내려 하지만 잘 안 된다. 여자의 웃음소리. 나대로 가로등 밑기둥을 꽉 부여잡는다. 그대로 꼼짝 않는다. 잠시. 나대로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아내 휴대폰을 귀에 대고 나타난다.

아내 : 뭐야. 나, 대로…? (깨운다) 자기, 일어나!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하도 안 들어오길래 나와 본 건데….

나대로 : 으, 음….

아내 : 일어나. 집에 가서 자야지!

나대로 : (흥얼거린다) 달팽이 한 마리가….

아내 : 아휴, 이 인간아. 이 상황에서 노래가 나와? 내가 아주 미쳐.

여자의 웃음소리 다시 들리면서 멀어져 간다.

아내 : 이놈의 동네 이사 가든가 해야지.

암전.



4. 야밤의 현실

아침 해가 뜨고 새가 지저귄다. 남편 깨우는 소리, 아이들 깨우는 소리. 한낮이 흐르고 노을이 진다. 어둠이 내리면 별과 반달이 뜬다. 나대로 '之' 자로 걸으며 나타난다. 노래.

나대로 : 모두 어딘가로 차를 달리는 길. 나는 모퉁이 가게에서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가로등 아래에 멈춘다) 친구. 눈이 맑고 마음도 맑은 친구. 난 자네가 좋아. 외로운 걸음들을 밝혀주지만, 정작 자네의 눈빛도 외롭다는 걸. 우린 맘이 통하는 사이….

나대로 집으로 향한다. 도어 록 버튼 누르고 들어간다.

아내 : 며칠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군.

나대로 : 술이 나를 부르는데 거절할 수 있나.

아내 : 유진이 학원 비 부족한데 어떻게 할 거야?

나대로 : 학원 세 군데 다니면 두 군데로 줄여. 아직 어려.

아내 : 유성이도 학원 줄였잖아. 줄이는 게 능사야?

나대로 : 능력이 안 되면 줄여야지.

아내 : 아주 배짱이네 이제.

나대로 : 나도 좀 살자. 내가 돈 버는 기계냐? 대출금 갚기도 벅차다고.

아내 : 다른 남편들은 한 달에 얼마 버는지 알아? 예린이 아빠는….

나대로 : (노래) 해는 높이 떠서 나를 찌르는데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아내 : 시끄러워!

나대로 : (노래) 어느새 다가와 내게 인사하고 노랠 흥얼거렸어.

아내 : 술 깨면 나중에 얘기하자고.(방에 들어간다)

나대로 : (소파에 앉는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쓰러져 눕는다)



5. 악몽의 현실

공간. 돌부리가 솟아 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돌을 빼내려 낑낑댄다. 나대로 그곳으로 간다.

사람1 : 보통 깊은 게 아니야

나대로 : 웬 돌입니까?

사람2 : 돌이 자라나서 큰 돌부리가 되었지 뭔가.

나대로 : 돌이 자라다니요?

사람3 :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 기억은 다 있잖아요.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 가면 그만이죠. 근데 그 작은 돌이 점점 자라더니 바윗덩어리가 되고 말았어요.

나대로 : 그때 빼냈어야 했는데.

사람1 :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죠. 누구나….

사람2 : 이젠 발이 걸리는 게 아니라 자전거가 걸리고 차가 부딪치고 사람들이 다 피해서 가고,

사람3 : 설마 했던 거야. 자갈만 한 돌부리가 이렇게 암세포처럼 자라날 줄이야.

나대로 : 저도 힘을 보탤게요. 다시 해보자고요.

사람들 힘을 다해 바위를 민다. 바위가 움직인다. 바위가 들어 올려지며 뿌리가 뽑힌다.

사람1 : 휴우. 힘을 모으니까 해내는군.

사람2 : 어, 저 안에 뭐가 있는 거 아니에요?

사람3 : 글쎄, 뭔가가 있는 거 같은데….

나대로 : 숨은 보물인가?

나대로 손을 넣어 꺼내자 뱀이다. 기겁을 한다. 뱀들이 사방으로 기어 나온다. 사람들 내뺀다. 나대로 방으로 뛰어들어가 이불 속에 몸을 숨긴다.

나대로 : 가! 가! 징그러운 것들아. 저리 가란 말이다!

아내 : (놀라서 깬다) 아, 뭐야? 언제 기어들어왔어? 가위 눌린 거야? 진짜 가지가지 한다.

나대로 : (일어나 손을 비빈다) 손에 똥칠을 해야 하는데….

아내 : 뭐라고?

나대로 : 뱀이 아니라 똥 말이야.

아내 : 자려면 곱게 자. 짜증 나. (돌아눕는다)

나대로 옷을 벗고서 반대로 돌아누워 달팽이 마냥 옹크린다. 잠시 후, 공간에서 반나체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나대로 일어나 그곳으로 간다.

나대로 : 또 뭡니까?

사람1 : 이게 안 보여요?

싱크 홀. 검은 구멍이 끝도 없이 꺼져 있다. 나대로 다가간다.

나대로 : 어? 어! 이게 뭐냐!

사람2 : (잡아끈다) 조심해요! 이렇게 큰 싱크 홀은 처음 봐. 깊어. 100m는 돼 보여.

사람3 : 돌부리 캐서 뱀 나올 때 예감이 안 좋더라. 대체 멀쩡한 땅이 왜 이렇게 꺼졌냐고.

나대로 : 가만, 잘 봐요. 저 깊은 곳에 뭔가가 있어요.

사람1 : 이번엔 이무기가 나오려나?

나대로 : (유심히 본다) 돈… 맞아… 도, 돈다발이 산더미로 파묻혀 있어….

모두가 내려다본다.

사람2 : 말도 안 돼. 저렇게 많은 돈이 땅속에 잠들어 있다니.

사람3 : 5만 원 권인가? 어마어마하군.

나대로 : 근데, 지금… 우리 옷이….

사람들 서로를 쳐다보더니 자신의 반라 몸을 확인한다.

사람1 : 내 옷이 어디 갔어?

사람2 : 땅이 꺼질 때 같이 벗겨 내려간 거 같은데.

사람3 : 내 지갑.

사람1 : 내 목걸이.

사람2 : 탈탈 털렸어. 아무도 모르게.

사람3 : 기가 막히군.

나대로 : 저 검은 지하 속으로 몰래 흘러들어 간 돈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요?

경찰 호루라기를 불며 온다.

경찰 : 비키세요. 위험합니다! 지금 옷 벗고 뭐하시는 겁니까?

사람1 : 우리도 당황스럽습니다.
---[본문 2:2]-----------------------------------

사람2 : 옷과 돈이 말도 없이 우릴 떠났다고.

경찰 : 응급 복구를 할 겁니다. 지금 수백 대의 덤프트럭이 오고 있어요. 꺼진 땅을 빨리 메워야 합니다.

사람3 : 저 속에 많은 돈이 보이지 않아요? 그냥 묻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경찰 : 저희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저리 가세요.

나대로 : 돈의 출처를 밝혀야지 무조건 지시만 따른다고 될 일이에요? 지시는 누가 내립니까?

경찰 : (잠시)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나대로 : 아, 아무튼, 저 깊은 지하가 우린 몹시도 궁금합니다. 이대로 덮을 수는 없어요.

경찰 : 가세요. 지금은 안전이 우선입니다. 추가로 무너지면 큰 재앙이 발생합니다. 아, 덤프트럭이 왔네. 모두 물러나세요!

나대로 : 안 돼요! 우린 알 권리가 있습니다. 안전을 핑계로 진실을 감추려 하지 말아요.

경찰 : 덤프 기사님, 자 됐습니다. 이제 흙을 쏟아부으십시오.

기계음과 함께 흙더미가 싱크 홀 안으로 쏟아져 내린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대로 : 이대로 덮을 순 없어! 멈춰! 멈추라고!

나대로 막으려 하다가 균형을 잃고 구멍 속으로 떨어진다. 비명. 흙이 계속 쏟아져 들어간다. 웃음소리. 일시 암전. 나대로 잠자리에서 허우적대며 벌떡 일어난다. 여자가 이어서 일어나 흉물스럽게 웃는다. 나대로 뛰쳐나간다.



6. 잠시 현실

밤. 가로등의 불빛이 오롯하다. 나대로 흐느적대며 노래 부른다.

나대로 : 내 모든 걸 바쳤지만 이젠 모두 푸른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내게 남아 있는 작은 힘을 다해 마지막 꿈속에서… (불빛 아래 선다) 헤이, 친구. 오늘은 상사한테 깨지고 후배들한테 은근히 무시당하고. 나, 회사 때려치울까? 묵묵히 걸어가라고? 너무 느려, 느려서 뒤처진단 말이야…. 바른길로 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꾸준하게 가고 있다고? 어느 길이 바른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생각해 볼게. 친구….

나대로 집으로 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소리 안 나게 조심한다.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내 잠자리 옆에 조용히 눕는다. 뒤돌아 누운 아내의 얼굴을 일시 확인하고서 안도를 한다.



7. 지독한 현실

아침이 밝는다. 새 소리. 남편 깨우는 소리, 아이들 깨우는 소리. 태양이 오전을 지나 오후로 접어든다. 다시 시간이 지나 노을이 진다. 경찰 방어벽을 세우고 앞에 선다. 사람들 몰려와 경찰과 대치한다. 구호를 외친다.

사람1 : 성을 허물어라!

사람2 : 저 성은 마녀의 성이었다!

사람3 : 우리는 마녀의 백성이 아니다!

사람1 : 성에는 검은 눈들이 득실대고.

사람2 : 성에는 검은 돈들이 넘실대고.

사람3 : 성에는 검은 탐욕이 꿈틀댄다.

나대로 사람들 사이에 합류한다.

사람1 : 알고 보니 군주는 마녀였다!

사람2 : 기가 차는 동화의 현실!

사람3 : 저 손길이 우릴 갉아먹고 나라를 갉아먹는다!

나대로 : 마녀가 꿈에서 날 괴롭힌다!

모두 : 허물어라! 허물어라!

경찰 : 시민 여러분,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나대로 : 마녀의 성을 보호하려고 차 벽을 치다니. 부역하는 겁니까, 지금?

경찰 : 우리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잠시) 가만, 이 양반 여기 또 나왔네? 불법 총기 휴대에다, 공무집행방해. 아무리 봐도 상습범인걸?

나대로 : 나는 지금 바른길을 가고 있어요. 내가 한 일은 모두 정당합니다.

아내가 시위 현장에 합류한다.

경찰 : 오늘은 같이 좀 갑시다. 아무리 봐도 불순한 세력 같아. 어디 소속이고 누구에게 사주받았는지 조사해야겠어. (끌고 간다) 이 봐, 의경들! 이 사람 연행해.

나대로 : 난 평범한 시민이에요. 세력도 없고, 빽도 없고, 배후도 없는, 달팽이 같은 서민이라고!

경찰과 나대로 실랑이를 벌인다.

아내 : 놔! 내 남편 건드리지 마.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한테! 물렁하니까 물렁뼈로 보이니?

나대로 : 여보!

경찰 : 아줌마는 저리 가요.

아내 경찰의 손목을 문다. 경찰 비명. 암전.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대로 : 자기는 여기 왜 나왔어?

아내 : 잃어버린 성을 되찾으려고. 자기는?

나대로 : 마녀가 꿈속에서 나를 괴롭혀. 깨보면 꿈에서 본 현실이고, 나는 현실을 꾸고 있었던 거야.

잠시.

나대로 : 미안해.

아내 : 뭐가?

나대로 : 달팽이처럼 무르게 살아서….

잠시.

아내 : 나, 다시 일하게 될 거야.

나대로 : 일?

아내 : 응. 아는 선배 언니한테 전부터 자리 부탁했었어. 자리 비면 연락 주겠다고 기다려 보래. 근데, 이번에 자리가 났다는 거야. 오늘 가서 면접을 봤어. 다음 주부터 출근해.

나대로 : 전에 했던 일?

아내 : 그래. 경력직 특별 채용. 나도 일하면서 내 삶을 다시 찾고 싶어. 그래야 가계에 보탬이 되고 자기랑 싸울 일도 없잖아.

나대로 : ….

아내 : 상사한테 아부도 못 하고 머리도 못 굴리고 무르고 순한 내 남편….

나대로 : 요즘은 보호막도 없는 알몸뚱이 민달팽이로 살아.

아내 : 패닉에 빠진 달팽이지.

나대로 나지막이 노래 부른다. 아내도 따라 부른다.

나대로, 아내 :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소리) : 조용히 해요! 여기 노래방 아닙니다.

유치장 어두워진다.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8. 물러난 현실

성 안의 공간이 나타난다. 밖에서는 거친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거울을 향해 앉아 있다.

여자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

침묵.

여자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현명하니?

침묵.

여자 : (톤이 높아진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지혜롭니?

침묵.

여자 : (신경질적으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냔 말이다!!

아무 대답이 없자 여자 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뜨린다. 사람들 성문을 부수고 몰려들어와 여자 주변에 모여든다. 여자 손을 위로 향한다. 이상한 주문을 중얼거린다.

여자 : 거울아, 거울아, 내 거울아 너는 내게 말이 없구나. 잠을 자는구나. 거울아, 거울아, 내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를, 현명한 나를. 너는 아니 거울아, 알고 있겠지, 거울아 내 거울아, 야속한 거울아….

여자의 몸짓이 점점 꼭두각시 움직임으로 변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긴 비명. 사람들 깨진 유리 조각을 내려다본다.



9. 돌아온 현실

밤 시간. 아내가 비틀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아내 :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가로등 아래 선다) 등불 아, 등불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 고마워…. 난, 너의 크고 순한 눈망울이 맘에 든단다….

아내 집으로 걸어간다. 도어 록 버튼을 누르고 들어선다. 나대로 소파에서 일어난다.

나대로 : 오늘 회식 있다더니, 늦었네?

아내 : (노래)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나대로 : 쉿, 다 들려. 씻고 자야지.

아내 : (노래)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나대로 : 알았어, 알았다고.

아내 : 야, 나대로! 그래 너는 너대로 잘살아 봐. 나는 나대로 살아갈 테니까.

나대로 : 들어가, 피곤할 텐데.

아내 : 누르면 움츠러드는 달팽이 녀석. 달팽이 한 마리가….

나대로 아내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다. 방을 나와 소파로 가서 보던 TV의 볼륨을 줄인다. 나대로 비스듬히 누워서 TV를 본다. 달팽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잠이 든다. 암전.

막 -끝-



* 극 중 노랫말은 패닉의 <달팽이> 가사를 인용하였습니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