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대통령의 혼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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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섭 편집국 부국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면서 지난 10월 말부터 소용돌이쳤던 정국은 다소 소강 상태로 접어든 느낌이다. 정치권의 당리당략은 더욱 어지럽겠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는 대체로 현재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대통령과 관련된 온갖 얘기 중 어느 하나라도 놀라지 않았던 게 없었지만, 그중 대통령의 밥상에 특히 눈길이 쏠렸다.

한국인에게 밥은 '밥 이상'이다. 단순히 먹는 것만이 아니라 상호 관계의 의미를 매개한다. 밥을 놓고 마주하는 밥상에는 감정과 정서, 관계의 층이 켜켜이 쌓인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보통 심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더욱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요즘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도 많다지만, 대체로 아직 밥은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먹는 게 일반적이다.

한국인에게 밥상은 소통의 현장
함께하는 식사로 정서·생각 공유
여론 들어야 하는 대통령엔 필수

박 대통령은 그동안 철저한 혼밥족
진솔한 국민 여론 들을 기회 날려
대통령은 식사 때 외로워선 안 돼


더구나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국가원수인 대통령과 같은 밥상에 앉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가 되고, 그 자체로도 어떤 메시지가 된다. 이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밥을 함께 먹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정견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적이 많았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여기서도 거의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진 내용을 보면 대통령은 거의 혼자 식사를 했다. 청와대 식당에서 혼자 TV를 보면서 먹는 혼밥을 아주 편안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이 밥을 먹으면서 어떤 프로그램을 즐겨 봤는지도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는 게 아쉽다. 어쨌든 혼밥에 관한 한 대통령은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른 듯하다.

사실 혼밥이 편안할 때도 있기는 하다. 끼니때마다 일일이 식사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되고, 메뉴도 그냥 내키는 대로 선택하면 그만이다. 밥을 먹다가 국물이나 밥풀을 옷에 흘려도 상관없다. 게다가 방해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을 때도 혼밥은 제격이다. 이런 장점이 최근 혼밥족을 늘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지도자가 매번 혼자서 밥을 먹어도 되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나누는 것'이라는 의미를 깔고 있다. 정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그러면서 미래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밥을 함께 먹는 것은 혼밥의 장점과는 비견될 수 없다. 더구나 대통령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찮아도 보통사람들에게 청와대는 차가움과 삼엄함으로 둘러싸인 고고한 성채의 이미지가 강한 데, 그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공간인 주방에서 TV를 보면서 혼밥을 먹는 대통령이 어떻게 국민의 여론을 접할 수 있을까 싶다. 국무위원들과도 거의 식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하니, 애초부터 밥상머리 소통은 안 되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줄곧 따라붙던 불통 논란은 이미 청와대 밥상에서부터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명운을 걸머쥔 지도자라면 최소한 밥상머리에서는 외로우면 안 된다. 깊고 깊은 청와대 내실 주방에서 혼밥을 즐길 게 아니다. 떠들썩한 시장통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먹는 한 그릇 국밥이 더욱 진한 여운을 줄 수 있다. 지도자는 최소한 하루 한 끼 이상은 다른 생각과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려 먹어야 한다. 식사 때만큼은 '혼자 먹지 않을 의무'가 지도자에게는 있다고 여기고 싶다. 실제로 금융권의 일선 지점장의 경우 같은 회사 직원과는 되도록 점심 식사를 못 하게 하는 내부 지침도 있다고 한다. 내부 사람끼리 어울릴 게 아니라 외부의 누구라도 만나 함께 식사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무엇이라도 듣는 게 있을 것이고, 영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대통령의 식사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혼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정치적 신뢰와 자산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놔두고도 박 대통령은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한 셈이다. 일부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시장통과 가까운 곳에 둬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지도자의 성공 여부는 가감 없는 여론 청취에 달려 있고, 시장통 집무실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직계 가족이 없는 박 대통령이 혼밥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 더욱 외로워진 게 결국 이번 사태의 빌미가 됐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혼밥은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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