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법의 문밖에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정영선 소설가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마트에 갔다 오다 단속하는 경찰에 걸린 적이 있다. 주택가 안의 이면도로였으니 중앙선 침범이나 신호위반일 리는 없어 의아했는데, 안전벨트 미착용이라고 했다. 경찰은 아주 단호하게 교통법규를 어겼다고 운전면허증을 내라고 했다. 나는 시속 30㎞ 정도의 이면도로에서 굳이 안전벨트 단속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설명했지만 나는 인정하지 못한다고 버텼다. 그렇게 시민의 안전이 걱정되면 더 불안한 곳에 가서 일을 하시라고 충고까지 했으니, 그분의 음성은 점점 높아졌다. 결국, 나는 운전면허증을 주지 않았고 경찰관은 그렇다고 해서 처벌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 뒤 나는 몇 만 원짜리 범칙금 통지서를 받았다. 기분이 나빠 안 내고 버텼더니 연체료가 붙어 나와 결국 내긴 했지만.

법 없이 살 사람은 법 밖의 사람
누가 안 봐도 늘 법 지키려 노력
법 아는 이들이 이 심리 악용해
촛불시위는 그 문을 여는 행위


이 이야기를 들은 언니는 간 큰 짓을 했다고 나를 나무랐다. 경찰에게 대들다니 그게 무슨 짓이냐고, 그럴 땐 제일 적은 걸로 끊어 달라고 부탁을 하란 충고까지 했다. 지금은 이면도로에서 뒷좌석까지 벨트를 해야 한다고 하니 할 말은 없지만, 그때는 언니나 나나 법을 몰랐다. 나는 법을 모르고 대들었고 언니 역시 법도 모르면서 경찰에게 대든 나를 나무라기부터 했다. 이상하게 그 경찰관보다 언니가 더 기분 나빴다. 언니는 자칭 타칭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었는데.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를 보면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란 말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선량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 가진 건 없지만 심성은 믿을 만한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다. 누군가를 일러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고 나 또한 선량한 삼촌이나 사촌을 그렇게 말했으니 흔한 표현이기도 했는데, 그 말이 이번에 딱 목에 걸린 고구마처럼 불편해졌다.

나는 뭔가 잔뜩 기대하면서, 집에서는 TV로, 밖에서는 인터넷으로 1, 2차 청문회를 봤다. 거의 비슷한 질문이고 똑같은 대답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회장님의 주위에는 변호사들이 보였고 때로는 변호사가 대신 대답하기도 했는데, 그 대답도 똑같았다.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하다, 알지 못한다, 뒤에 보고받았다, 만나지 않았다, 였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법 안에서 불법에서 불법 아닌 것의 경계를 넘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 자리에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이 앉았다면 어떻게 될까. 그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고 잘못했다는 말을 셀 수도 없이 했을 것이다.

그 청문회를 본 이후 나는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은 법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아예 법을 모르고 법이 있는 줄만 안다. 늘 법을 의식하면서 누가 보지도 않는데 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조그만 잘못에도 호통치는 법에 당장 무릎을 꿇고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부끄러워하면서.

카프카의 짧은 에세이 '법 앞에서'를 보면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평생을 기다리다 죽는 사람이 나온다. 법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열려 있지만 시골 사람은 문지기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죽기 전에 묻는다. 왜 아무도 이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지.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문이었다고. 워낙 어려운 글이라 이해하긴 어렵지만 우리는 시골 사람보다 더 딱하게, 법 밖에 있는 줄도 모르고 법을 지키며 살았던 건 아닐까 싶었다. 법을 안다는 게 큰 착각이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법은 어쩌면 법 밖에 선 사람들의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법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권력을 남용하고 법을 어긴 후에는 그 법을 이용해서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나는 청문회를 보고 나서야 우리가 들었던 촛불의 의미가 단순히 대통령 탄핵이 아니라, 그 견고한 법의 문을 여는 행위였음을 알았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