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19년 전 박근혜와 오늘의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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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신 사회부장

딱 19년 전 오늘이다. 1997년 12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은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한나라당 입당 기자회견장에서 박 대통령은 "60~70년대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오늘 같은 난국에 처한 것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나 목이 메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이러한 때 정치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출입기자로 현장에 있었던 기자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박 대통령에게 정치의 동인은 '아버님에 대한 생각'과 '부모님에 대한 도리'였다. 세월이 흘러 박 대통령은 결국 아버지처럼 대통령이 됐지만, 탄핵 결정을 기다리는 처량한 상황에 봉착했다.


1997년 12월 11일 한나라당 입당
"부모님에 대한 도리로 정치 참여"  

최순실 게이트는 박정희시대 유산 
지지한 무지렁이 국민 생각한다면 
사즉필생 각오로 이 사태 책임져야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입당 기자회견장 어딘가에 최순실 씨가 있었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그때부터 최 씨가 준비한 원고를 읽었을 수도 있다. 당시의 '박정희 마케팅'은 적확했고,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최상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다. 박정희 리더십이 오히려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무려 50년이 지났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1960~70년대식 통치가 2010년대에 통할 리 만무하다. 모바일과 SNS가 판을 치는 세상에 '새마을 정치'는 버텨 낼 재간이 없다. 국민은 더 이상 계몽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국민은 스스로 계몽했고, 스스로 통제를 거부한다. 200만 명이 동시에 촛불을 드는 기네스적 기록을 만들어 내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독점의 시대가 가고 공유의 시대가 도래한 사실을 박 대통령만 모르고 있었다. 최순실 씨만 독점한 권력에 보수와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은 무너졌다. 최 씨는 대담하지만 천박한 '강남 아줌마'였다. 그런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 기막힌 상황에 보수언론조차 재갈을 거부하고 칼을 들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지난 9일 부산의 한 강연에서 "삼성의 중앙일보(JTBC)가 최순실 게이트의 포문을 열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고 말했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사실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도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로부터 '통치의 기술'을 배웠을 때 최 씨는 아버지 최태민 씨로부터 '사기의 기술'을 배웠다. 어떻게 하면 최고의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할 수 있는지 옆에서 지켜보며 배웠을 것이다.

다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점을 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최 씨도 간과하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해도 들통이 나지 않는 세상, 들통이 나더라도 눌러서 묻을 수 있는 세상이 지금은 아니다. 사태의 시작을 두고 누구는 '개싸움'이라 하고, 누구는 '질투'라고 하지만 이 파국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태블릿PC란 게 생겼고, 휴대전화는 녹음이 가능하고 복원이 되는 세상이다. 21세기의 정보의 흐름은 민주주의를 보편화, 일상화시켰다. 여기에 익숙한 국민은 화염병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서도 50년간 이어져 온 강고한 잔재를 청산했다.

'사기꾼' 최순실 씨에게는 기회가 없었지만 정치인 박 대통령에게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사즉필생'의 각오로 모든 것을 던졌어야 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죽어야 사는 게 정치다. 지난 두 달을 돌이켜보자면 박 대통령은 버티다 밀리고, 또 버티다 밀렸다. 두 번째 담화에서 국민이 요구하는 그 이상을 던졌으면 사태는 조기에 매듭지어졌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이 최 씨의 범죄 행각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만 몰랐을 뿐 청와대 내부에서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이라는 말이 나왔고, 측근 차은택 씨는 '박근혜·최순실 공동정권'이라고 표현했다. 설사 공범이 아니라하더라도 희대의 사기꾼에게 이용을 당하고, 국정이 농단되고, 결과적으로 국정이 마비되는 이 사태에 대해 대통령은 책임을 져야 한다. 최 씨가 아니라 박 대통령을 지지하고, 최 씨가 아니라 박 대통령에게 정권을 맡겼던 무지렁이 국민들을 생각한다면 그 책임도 최 씨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 져야 한다.

물론 탄핵소추안 가결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야당과 국민은 이제 법과 절차의 진행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치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법과 절차의 뒤에 숨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국민이 피땀 흘려 일으킨 나라'가 지금 도탄에 빠져 있다.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진리는 아직도 유효할지 모른다. zer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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