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탐식법] 기러기를 친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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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날고 단풍 물드는 계절이다. 그러니 이 계절에 기러기와 아니 친할 수가 없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노래를 떠올리며 창밖을 올려다봐도 끝없이 하늘을 난다는 기러기 떼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친히 찾아 나서야 할 터.

기러기가 쉬어가는 정자가 있다고 들었다. 전주 비비정(飛飛亭)이다. 그곳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부른다니 만추에 수묵화 같은 비경을 놓치고 싶지 않다. 좀 멀면 어떤가. 의기투합한 일행도 정해졌다.

떠날 날짜가 가까워질 무렵 뜻밖에 기러기를 볼 기회가 생겼다. 부산 근교에 기러기 농장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러기 요리까지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기러기 고기를 먹는다니….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곧 '네발 달린 짐승 중에는 나귀 고기가 최고이며, 날개 달린 짐승 중에는 기러기 고기가 으뜸'이라는 속담이 선입견을 제압한다.

문헌을 뒤적였다. 동의보감에 풍비로 저리고 기가 돌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는 허준 선생의 엄준한 말씀이 계셨다. 더군다나 머리털과 눈썹을 자라게 하고 뼈를 튼튼히 한다는 명 구절은 계절병을 치료하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이 식탐을 끌어당겼다. 난생처음으로 찾아간 기러기농장에는 스무여 마리의 기러기들이 얌전히 있었다. 철새 기러기를 식용으로 개량한 것으로 일명 '머스코비 덕'이라고도 했다. 뒤뚱거릴 때마다 잿빛 깃털이 낙엽처럼 바스락댔고, 목덜미의 붉은 살점은 단풍잎마냥 흔들거렸다. 그들은 연신 머리를 주억이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측은지심에 망설이는데 뒤꼍에서 모이를 쪼던 닭의 함성이 담장을 넘었다. 그럼 그렇지. 치킨을 마다할 자신이 없듯이 기러기의 효능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기러기 고기의 출현이 이어졌다. 이른바 코스요리인 셈이다. 전골냄비에 육수가 부어지고 팽이버섯과 어린 배추와 숙주나물이 넉넉하게 끼얹어졌다. 얇게 저민 샤부샤부용 생고기가 먼저 나왔다. 육수에 익혀도 되지만 날것을 그대로 먹어도 된단다. 채소와 함께 마늘소스에 찍어 한입 머금었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첫맛이 반긴다. 고소하기까지 하다. 걱정했던 누린내도 나지 않는다. 참기름에 무쳐낸 육회는 소고기 맛과 구별하기 힘들다. 기러기 보쌈과 탕수육이 올려지고 기러기 백숙과 기러기 죽이 연거푸 상 위에 앉는다. 비비정 못지않은 낙안 풍경이다. 모처럼의 포식에 남은 두어 가지 요리는 연신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삼백초를 넣어 달인 기러기 뼈 육수를 한 사발 먹어야 보양이 된다는 주인장의 엄포는 끝내 거역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온몸을 열어 기어코 기러기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틀 후 예정대로 전주 비비정을 찾았다. 비비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만경강 물이 깊었던 한때는 기러기 무리가 모래벌을 까맣게 덮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강둑에는 겨우 한두 기러기 무리만 물숲을 거닐고 있었다. 그곳을 안내하던 전주 토박이 지인은 기러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 진실로 슬퍼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죄인이 된 입을 꾹꾹 다물고 말았다.

때마침 춘원 이광수가 죽어 만일 새가 된다면 반드시 기러기가 되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슬며시 강섶 갈대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내 몸속에 묻힌 기러기의 명복과 함께 나도 죽으면 기러기가 되게 해달라고 춘원의 흉내를 내었다. jung-0324@hanmail.net

김정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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