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어서_풀자] 작은 속삭임 엮어 큰 함성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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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후 부산 서면에서 열린 촛불 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를_탄핵하라'라는 문구를 앞세우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김경현 기자 view@

'#(해시태그)' 열풍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거세지고 있다.

2007년 트위터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른 SNS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그 쓰임새가 확산된 해시태그는 초창기엔 업체들의 홍보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먹방' 등 가벼운 주제를 묶는 데 주로 활용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며 일종의 사회운동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은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의 힘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가벼운 주제 묶는 데서 시작해
정치·사회 이슈 만드는 역할로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SNS에서 시민들 스스로 주도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해시태그가 유례없는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최순실 게이트에서 비롯됐다. 대통령 퇴진 등을 외치며 부산 서면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평화 시위의 발단이 바로 '#그런데최순실은' 해시태그다.

SNS에서 '#그런데최순실은'이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달 초. "교문위에서 최순실과 차은택을 증인으로 부르자는 걸 결사 거부한 사실은 묻히고 있다"며 해당 이슈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모든 포스팅 끝에 붙이자는 김형민 SBS CNBC PD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 농단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자는 뜻에서 이뤄진 시도는 일종의 놀이처럼 SNS상에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포스팅 내용과 관련 없이 붙이는 뜬금없는 해시태그였지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놀이가 사회운동의 단초가 된 것이다. 이후 최순실과 관련된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나와라최순실' '#하야하라박근혜' '#가자광화문으로' 등 다양한 메시지로 진화하면서 대중매체의 관심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공분까지 끌어냈다. 온라인에서 모인 시민들의 힘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져 전국 각지에서 평화 집회 형태로 분출됐다.

고영삼 한국정보화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이번엔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다"며 "SNS를 기반으로 흩어져 있던 독자 미디어들이 해시태그를 통해 정치의 영역을 삶에 끌어들이고 기존 매체의 관심도 끌어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부산국제영화제(BIFF) 탄압을 둘러싸고 올해 초 온라인상에서 번져나간 '#ISUPPORTBIFF(BIFF를 지지합니다)' 해시태그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영화인은 해시태그를 공유하면서 BIFF 정상화를 위해 힘을 실어줬고, 이는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져 우리나라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태국 등 세계 각지에서 BIFF 독립성 보장을 촉구하는 '#ISUPPORTBIFF'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탄압을 둘러싸고 올해 초 온라인상에서 번져 나간 '#ISUPPORTBIFF(BIFF를 지지합니다)' 해시태그 모습. isupportbiff 홈페이지
해외에서도 이런 사례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지난 2014년 나이지리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가 학교에 침입해 여학생 270여 명을 납치했을 당시 전 세계적으로 벌어진 '#BringBackOurGirls(우리 딸들을 돌려주세요)' 온오프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미국 미셸 오바마 여사와 멕시코 여배우 셀마 헤이엑이 동참해 화제를 모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말 프랑스 파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낸 테러사건 이후 이어진 '#PrayForParis (파리를 위한 기도)', 지난해 초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를 상대로 한 테러 당시 번져나간 '#JeSuisCharlie(내가 샤를리다)'도 전 세계가 주목한 해시태그다.

대책·자성 끌어내는 도구 되기도

해시태그를 통해 쉬쉬해 오던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이 마련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지난달 하순 처음 등장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대표적이다. 이는 한 유명 웹툰 작가가 미성년자 성폭행을 방조했다는 글로 시작된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에서 비롯됐다. 문단 내에서 빚어진 성희롱과 성추행, 성폭력 관련 폭로 글에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잇따라 붙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일부 시인들과 소설가는 저서 출간 계획을 철회하고 공개사과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시인은 성폭력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합의된 행위'였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피해자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작가회의와 한국시인협회가 "제기되는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제명 등 상응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진화에 나선 가운데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폭로는 서울예대에 관련 대자보가 붙으면서 오프라인으로 확대됐다.

이에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에선 전·현직 출판계 종사자 257명을 대상으로 출판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벌이고 언어적·시각적·신체적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는 피해자가 10명 중 7명(68.4%)에 달한다는 결과를 지난 10일 내놓았다. 일부 출판사에선 해당 시인과의 계약을 철회하기도 했다.

'#문단_내_성폭력'은 이후 '#미술계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등 문화계 전반뿐만 아니라 교회, 운동권, 대학, 가족 등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자정 선언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초부터 지금까지 관심을 끈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는 특정 주제에 대한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한 사례로 간주된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권리를 맘껏 주장하자'는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 교수의 말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왜곡된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를 다소 허물고 누구나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꺼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줬다.

나여경 소설가는 SNS의 해시태그가 고질적인 병폐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나 소설가는 "SNS가 마주 보고 대화하는 수준으로까지 일상생활에 파고든 데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모이면서 공론화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소설가인 정혜경 동의대 인문학부 교수는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SNS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결과라고 바라봤다. 정 교수는 "성추행 등을 공론화하는 작가가 오히려 피해를 입는 사례가 빈번했던 과거엔 대면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다"며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데서 용기를 얻은 몇몇 발언이 해시태그를 통해 한데 모이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면서 어느 정도 자정 효과도 거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보코하람에 의해 여학생 270여 명이 집단 납치된 지 1년을 맞아 지난해 4월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에서 시민들이 해시태그를 앞세우고 침묵 행진을 하는 모습. 일부 연합뉴스 제공
■기존 질서에 대한 시민들의 대반란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 오며 <페니스 파시즘>을 쓰기도 한 노혜경 시인은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의견 개진이 활발하게 전개됐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며 "특정 주제가 일반 시민에게로 퍼지고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고 평했다.

이처럼 정치, 문화 등 다루기 민감하거나 외면받던 주제가 공론화되고 대중의 힘이 집결되는 데 대해 많은 전문가는 대중매체와 검찰, 정치 등 기존 체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SNS에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시민들이 직접 여론 형성에 나선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시민들이 해시태그를 통해 SNS를 단순히 의견을 쏟아내기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뜻을 모아 내는 도구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정용하 교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 결집 방식은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고 관측했다.

평소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주제나 정보에 대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주효했다. 부산대 사회과학연구원 이일래 박사는 "해시태그는 검색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는 놀이문화로 접근된 측면이 있다. 이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좀 더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한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최순실 씨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에 '#나와라_최순실'이 새겨져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고영삼 수석연구원은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여론 형성 메커니즘이 완전히 탈바꿈됐다고 평가했다. 앞으로는 기존 언론의 보도로 촉발되는 여론이 아니라 SNS에서 시민들 스스로가 여론 형성을 주도해 나가는 시스템이 정착될 것이라고 바라봤다. 고 수석연구원은 "집단지성의 발현이 SNS상에 활자로 남겨진 만큼 지난 2008년 촛불 집회와 달리 소위 유언비어나 괴담이 사라진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윤여진 기자 onlype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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