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퇴진' 그 이후엔?] '살아있는 민주주의' 실천이 필요하다
거리가 온통 촛불로 물들었다. 지난달 말 대통령 비선 실세 의혹이 제기된 이후, 그와 연루된 고위 공직자의 부패와 비리, 기업에 대한 부정 청탁, 교육기관의 특혜 시비 등 비상식적인 현실의 민낯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권력층의 부정을 성토하고, 정치권에 변화를 요구했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만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의 시민이 모였고, 한 주 뒤인 19일에도 전국적으로 8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이번 집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최대 인원이 모였음에도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집회에서는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시민들이 자유발언대로 나와 시국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다른 시민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특히 그간 정치 주체로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던 청소년들이 다수 참여해 자신의 소신을 얘기하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 자신을 며칠 전 수능을 끝낸 고3이라고 소개한 한 여학생이 있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례입학이 자신과 같은 고3 수험생들에게 큰 좌절감을 주었다며 발언을 시작했다. 이어지는 발언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 학생은 이번 집회가 모든 계층이 어우러진 전 국민적 참여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지만, 꼭 극복해야 할 한계점도 안고 있음을 지적했다.
"지금 국민과 언론이 지나치게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학생의 말은 새겨볼 만하다. 학생이 말했듯이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일어난 4·19 혁명 이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1979년 10·26 사태로 독재정권이 무너졌지만, 곧 전두환 군부가 비민주적 방식으로 집권한 역사가 있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퇴진 이후의 구체적 대책에 관한 시민들 사이의 논의가 절실하다는 학생의 주장에 많은 시민이 공감을 표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통령 퇴진 이후 부패한 정치와 권력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이에 관해 미국의 민주주의 활동가 프란시스 무어 라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책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그녀는 정치와 권력이라는 개념을 근본적 차원에서 재정의 한다. 그녀에 따르면 정치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특정 지역에서 특정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본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결정 사안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그 의견들을 종합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대표자를 정하는 것을 넘어 일상의 곳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를 실천할 때, 우리가 염원하는 정의로운 사회도 현실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불행히도 우리는 투표나 집회 외에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방법을 잘 알지 못한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라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민주주의 기술들을 소개한다. 그녀가 소개하는 기술들은 상대방 말을 귀 기울여 듣기, 창조적 논쟁하기, 중재하기와 협상하기, 정치적 상상력 발휘하기, 공적 대화의 장에 참여하기, 함께 결정 내리기 등 일상적이지만 우리가 애써 배우지는 않았던 삶의 기술들이다.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실천할 이러한 기술들을 익히는 것은 또한 잃어버린 권력을 다시 손에 쥐는 것과도 같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선한 권력을 행사할 때, 나아가 내 삶의 주인이자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부패한 정치의 무력한 피해자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 훌륭한 지도자를 기다리다 절망하기를 반복할 필요도 없어진다. 살아있는 민주주의에서 희망이란 미래에 일어날 법한 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변화의 실천 속에서 솟아나는 삶의 에너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실천할 때, 희망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
윤한결
인디고잉 편집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