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향기] 다시 무진기행을 읽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정영선 소설가

지지난 토요일 '밀다원 시대' 문학제가 부산근대역사관에서 열렸다. 서울에서 김동리 선생의 아드님을 비롯한 손님들이 관광버스 한 대로 왔으니 큰 행사였다. 나도 책 나눔 행사에 쓸 책 5권을 들고 축제 장소로 갔다. 행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목소리를 조금 낮춰 물었다. 저녁에 서면 갈 낍니까. 아니면, 서면 갈 거죠. 대답들도 비슷했다. 당연히 가야지, 아니면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그날 제사가 들었다는 동료는 서면에 못 가 영 아쉬운 표정이었다.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자갈치시장 안에서의 뒤풀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누군가는 벌써 페이스북을 통해 서면의 집회 상황을 중계했다. 부산소설가협회 회장님도 사정을 안다는 듯, 어느 행사보다 일찍 뒤풀이를 마무리했다.

괴이한 '엘시티' 건설현장을 본 후
돈과 권력 탐욕의 악순환에 진저리
우리나라 곳곳에 '최순실' 있어
대한민국이 '무진'인 듯한 느낌


어차피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서면에서 내려 시위에 참여하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뜨거워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하야 아니면 퇴진을 주장하고 7시간에 대한 차마 말하지 못할 소문을 주고받을 때에도 나는 맞장구를 치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듣고만 있었다. 오히려 대통령이 그럴 리가 있냐고 되묻고는 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소문도 안 듣고 뭐 했냐고 시원찮아했다. 서면은 가까워 오고 맞은편에 앉은 동료 작가 두 사람은 스마트폰으로 누군가가 올린 시위현장을 보고 있었는데, 나는 뜨거워지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자신이 낯설어 박근혜 대통령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시어머니에게 전염된 건 아닌가, 몰래 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엘시티 때문이다. 한 달 전쯤 아침 바다가 보고 싶어 자전거를 타고 미포로 내려갔다. 선창 근처 새벽 장에서 문어라도 한 마리 사야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미포 입구에 올라오고 있는 건물이 그 유명한 엘시티라는 걸 안 순간 평생 몇 번 해 보지도 않은 쌍욕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60m 이하로 지어야 하는 곳이라는데 그 건물만 최고 410m가 넘는다는 것이다. 달맞이언덕이 시작되는 바닷가, 그 복잡한 곳에 어떻게 그런 초고층 건물이 허가가 날 수 있는지, 나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솔직히 그날 이후로 어떤 부패도 새롭지 않았다.

엘시티 건설현장을 보고 온 며칠 뒤 무진기행을 서너 번 읽었다. 서울에서 돈 많은 과부와 재혼한 윤희중이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안개로 유명한 무진으로 내려온다. 사람들은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그를 욕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중학교 동창인 조가 무진의 세무서장으로 있고 그 중학교에 후배 박과 하인숙이 교사로 있다. 하인숙은 자신을 사랑하는 박이 보낸 편지를 조에게 보이고 조는 인숙을 불러 같이 놀지만, 그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 윤은 박이 좋아하는 줄 알면서 인숙과 밤을 보내고, 서울로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다음 날 전보를 보자마자 인숙을 버린다. 그는 꼭 한 번만 더, 이 부끄러움을 용서하자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그 말은 어쩐지 상습적으로 들렸다. 물론 무진 밖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을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소설을 읽을 때 최순실 사건이 정신없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대한민국이 무진인 듯했다. 소설 속 공간과 현실 속 공간이 헷갈렸다. 권력을 가진 자는 돈을 요구하고 돈을 가진 자는 권력에 아부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한 시인의 말대로 최순실은 청와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닷가에 410m짜리 건물이 어떻게 설 수 있다는 말인가.

김승옥 선생은 4·19혁명 이후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무진기행에 드러냈다고 한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3년 뒤의 작품이다. 내가 이러려고 시위했나, 싶지 않았을까. 내가 뜨거워지지 않는 이유를 겨우 찾은 것 같았다. 동시에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미리 실망할 필요는 없지. 나는 서면역 계단을 힘차게 올라갔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