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불행한 제왕(帝王)과 이별을 고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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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현 정치부장

김영삼(YS) 정부가 막 출범했을 때의 일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장 요청으로 저녁을 같이한 YS 핵심측근은 들고 온 007가방을 놓고 자리를 떠나는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웠다. "정신 없으시네. 가방을 들고 가셔야지" "아. 예…." 그는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멋쩍은 듯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왜 멋쩍어하지?' 이상하다 여긴 그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게 돈 가방이었던 거야. 그 양반이 회사로 돌아가서는 '돈 받는 방법을 알아야 건네 주지' 하면서 혀를 찼다는 거야."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의 부산 인맥들이 정권실세로 급부상하자 이들에게 선을 대려는 인사들이 각종 연줄을 찾아 부산을 들락거렸다. 이들은 대기업의 일감을 몰아주겠다는 제안을 하는가 하면 주변 친인척의 취업도 적극 돕겠다는 의사도 직간접적으로 전달했다.

절대 권력 접근 시도 집요해
6공화국 대통령 6명 모두 불행
박 대통령, 국민기대 무너뜨려

제왕적 대통령제 이젠 손볼 때
난국 풀 수 있는 해법 될 수도
문재인·안철수 전향적 자세를


절대 권력을 쥐게 된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접근하려는 시도는 이처럼 집요하고도 끈질기다. 하물며 그 대상이 대통령과 '피가 섞인' 사이라면 두말할 나위 없다.

'황태자' 박철언(노태우 정부) '소통령' 김현철(김영삼 정부) '홍삼트리오'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김대중 정부) '봉하대군' 노건평(노무현 정부) '만사형통' 이상득(이명박 정부). 대통령의 친인척들은 예외 없이 주변의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다.

챙길 가족이 없다 해서 친인척 비리만큼은 없겠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박근혜정부는 검찰이 20일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범죄 혐의 전반에 대통령이 상당한 공모관계에 있다'고 밝힘으로써 국민들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려 버렸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 경우는 그래도 '아버지가, 형이, 동생이 대통령이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는 씁쓸한 이해가 국민들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분노는 일개 민간인과 그 부역자들이 앞장서 헌법질서를 파괴한 데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대통령이 공사를 구별하지 못한 채 이들의 일탈에 가담한 것이어서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5년 단임 직선 대통령제'의 1987년 헌법체제하에서 권력을 잡은 6공화국 6명의 대통령이 예외 없이 불행한 전철을 밟은 것은 대통령이 제왕이 되고, 그래서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왕으로부터 나오는 잘못된 헌법 작용이 30년 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100% 비리로 얼룩진 정권의 불행은 5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 현행 대통령제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이제 정치권의 무게중심은 탄핵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이 스스로 하야를 선택하지 않는 한 법이 정한 테두리내에서 택할 수 있는 카드는 탄핵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탄핵과는 별도로 정치권은 정권마다 반복되는 국가의 불행을 막기 위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한을 분산시키는 헌법개정에 관심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절대다수 국민의 목소리와 자발적으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대통령이 맞서는 작금의 난국을 풀 수 있는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다행히 정치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개헌에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야가 현행 대통령 중심제의 권력구조를 분권형으로 손질하고, 여기다 대통령의 사임시기를 부칙으로 명시함으로써 조기 선거를 치르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안철수 두 사람이다. 이들은 정권 퇴진을 외치면서도 대통령제를 손보려는 개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특히 두 사람은 지난 대선에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본 후 권력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이미 당안팎에서 사실상 제왕적 지위를 누리고 있고, 이들 주변에 벌써부터 어른거리는 비선(秘線)의 그림자를 보면 설사 권력을 쥔다 해도 '100% 실패 대통령'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취임 초 "친인척 비리만은 엄단하겠다"며 이전 지도자들과는 다른 결기를 내보였던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말 예외 없이 "국민 앞에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제왕의 위치에 있어 불행한 대통령을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기 때문이다.

jhno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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