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띄어쓰기, 신문의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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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양대 국책은행, '빈 껍데기' 혁신안 발표하고 '자리보전' 급급>

이런 기사 제목, 알고 보면 아주 재미있다. 원래 의도는 '자리 지키기에 급급한 두 국책은행이 제대로 된 혁신안을 발표하지 않는다'였을 터. 하지만, '두 국책은행이 빈껍데기뿐인 혁신안을 발표하고는, 병이 들어서 자리를 깔고 누웠다'는 뜻이 돼 버렸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자리보전(--保全): 병이 들어서 자리를 깔고 몸져누움.(그동안 응보는 여전히 병석에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는데, 의원의 말로는 여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자리보전'은 이런 뜻이어서, 꼭 쓰고 싶다면 '자리 보전'으로 띄우기라도 해야 했다. 반면 '빈 껍데기'는 붙여 써야 했고…. 사실 띄어쓰기는 글로 밥 벌어먹는 기자나 문필가들도 어려워하지만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니 익혀야 할밖에. '부산 시민은 한목소리로 원전 폐쇄를 외쳤다'라는 문장을 보자. '한목소리'의 사전 풀이가 '①여럿이 함께 내는 하나의 목소리. ②같은 견해나 사상의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므로 부산 시민은 여러 명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한 목소리'로 띄어 쓰면 목소리가 하나이니 외치는 시민은 단 한 사람이라는 얘기가 된다. 띄어쓰기 하나에 사람 수가 이리저리 바뀌는 판인 것. 아래에서도 띄어쓰기의 힘을 알 수 있다.

'①친구를 잘못 사귀었다./②친구를 잘 못 사귀었다.'

①은 잘못된 친구를 사귀었다는 뜻이고, ②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는 뜻. 그러니 ①은 그래도 친구가 있지만, ②는 거의 혹은 아예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띄어쓰기, 이거, 알면 알수록 좀 무섭지 아니한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덕분에 그간 가려 있던 여러 가지가 드러났는데, 그 와중에 신문들의 우리말 실력도 알게 모르게 노출됐다. 특히 띄어쓰기. 아래 제목들을 보자.

<'강제모금' 안종범 이어…'최순실 프리패스' 안봉근도 수사 선상>

'수사선'은 한 단어이고, '-상'이라는 접미사도 굳이 필요하지는 않으므로 '수사 선상'은 '수사선'이라야 했다.

<"죽을 죄를 졌다"면 성실하게 수사 임해야>

여러 신문이 저렇게 '죽을 죄'로 썼는데, 잘못이다. '죽을죄'는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그러고 보면, 진짜 실력은 위기 때 드러난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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