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33. 음유시인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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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심의 거부하며 위헌 판정 이끈 '투쟁하는 가객'

음유시인에서 투쟁하는 가객으로 대중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정태춘. 1980~1990년대를 울부짖었던 그의 노래가 이 시대에 다시 반복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최근 밥 딜런의 2016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 중, 밥 딜런이 탔으니 다음엔 우리나라 음유시인 정태춘도 가능하다는 최광임 시인의 말에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

노래하는 시인에서 투쟁하는 가객으로 대중음악계에 올립(兀立)한 정태춘의 노래 가사와 곡조는 그 시절의 밥 딜런에게 전혀 뒤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때로는 능가했다. 협잡과 추문이 무성한 시대. 지금 광화문에는 정태춘의 노래가 필요하리라.

첫 앨범 '시인의 마을' 작사상
박은옥과 결혼, 부부 듀엣 결성
'떠나가는 배' '북한강에서' 대박
'아, 대한민국…'은 사회 모순 비판

55편 시 모아 '노독일처' 발간
사진작가로 변신 개인전까지

■군복무중 '시인의 마을' 써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5남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 5학년 때 큰 매형이 구해 온 기타를 처음 접하고 틈만 있으면 가지고 놀았다. 당시 악보를 볼 줄 몰랐지만 한 번 들은 노래는 기타로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정태춘의 시작이었다. 중학교 입학 후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고교 2학년 때 현악반은 밴드부로 바뀌며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방황을 시작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음대 진학을 위해 당시 을지로6가에 있었던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하지만 사춘기의 열병과 염세주의에 빠져 재수생활을 때려치우고 짐을 싼다. 이후 밀양·목포·울릉도·제주도 등으로 가출을 하기도 한다. 이 무렵부터 그의 초기 곡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1975년 입대 후 군복무를 하면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木浦의 노래(여드레 팔십리)' 등 많은 곡을 쓴다. 1978년 6월 제대한 그는 입대 전부터 안면이 있던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소개로 서라벌레코드사를 통해 그해 11월, 첫 음반 '詩人의 마을'(1978)을 발매한다. 좋은 반응으로 음반사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받았고 당시 신인 가수였던 박은옥을 만났다. 연인 박은옥의 첫 앨범 '회상'(1978)에도 전곡을 작사 작곡한다. '시인의 마을'과 '촛불'이 히트하면서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1980년 박은옥과 결혼한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흥얼거려지는 그의 초창기 대표작 1집에 이어, 자신이 직접 선곡한 곡들을 수록했던 2집 '사랑과 人生과 永遠의 시'(1980), 가야금·피리·해금 등 국악 반주로 연주되어 있는 공들인 세 번째 음반 '정태춘 제3집'(1982)은 철저하게 대중들에게 외면당한다.

■공연장 아닌 집회장에서 노래 불러

박은옥과 부부 듀엣을 결성 후 정태춘·박은옥 4집·5집이라 명명된 '떠나가는 배'(1984)와 '북한강에서'(1985)를 발매해 연이은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1985년 1월, 부산가톨릭센터에서 열린 '정태춘 노래마당'을 통해 몇 년간의 공백을 깨고 활동을 재개한다. 이 공연은 후에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 마당'으로 바뀐 후 1987년 10월까지 성공적으로 계속된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마산, 울산 등 거의 전국 소극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 공연을 통해 각지의 관객과 만나 아주 가깝게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대중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통해 방송이나 음반에서는 할 수 없었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보 예술 운동 진영과의 접점이기도 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혁명정신과 민족음악운동이 함께 빚어낸 옹골찬 성과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 페이퍼크리에이티브 제공
1988년에 발표된 '정태춘·박은옥 戊辰 새 노래'(1988)는 정태춘의 변화를 여실히 담고 있었다. 시적이며 이야기성이 강한 노래는 고향에 살지 않는 도시인의 정한(情恨)을 국악적인 질감에 담기도 하고 차분하고 다정한 포크 곡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현실에 대한 응시와 고민도 예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음악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 것이었다. 이때부터 정태춘은 일반적인 공연장에서 벗어나 집회장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1988년 12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진행한 노래와 영상, 국악 연주가 어우러진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는 그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민족적 주체성과 사회적 비판 정신을 노래하는 정태춘의 재탄생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전교조 지지 순회공연으로 이 공연이 확대되면서 정태춘은 노래운동가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당시 완전히 노래운동가가 된 그의 노래는 죽창처럼 날이 서 있었다.

이러한 정태춘의 변화를 가장 선명하고 뜨겁게 담고 있는 음반이 바로 7집 '아, 대한민국…'(1990)이다. 그간 음악운동의 성과를 모아 새로운 음반을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새 노래들과 이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 걸려 음반화하지 못했던 '인사동' 등을 담는다. 당시 한국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빈민층과 민족민주 열사의 삶과 정신을 아프게 위로하고 있는 이 음반은 정태춘 특유의 다변(多辯)이 본격화 됐고 노래 하나 하나가 한 개의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직설적이고 서사적이다. '아, 대한민국…'을 비롯한 총 11곡 중 심의를 통과한 곡은 '황토강으로' 1곡뿐이었다.

■사전심의제 위헌 판정 이끌어내기도

결국 정태춘은 부당한 음반 사전 심의 제도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는 사전 심의를 거부하고 심의를 통과하지 않은 곡까지 고스란히 음반에 담아낸다. 1993년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1993)를 발표하면서 사전 심의 거부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자청한다. 이듬해 불구속 기소되고 재판까지 회부되는 등 풍파 속에서도 그는 사전 심의 제도에 대해 헌법 심의를 청구했고 결국 위헌 판정을 받아냈다. 정태춘의 싸움이 오랫동안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얽어매던 족쇄와 금기를 부숴버린 것이다. 이 음반은 정태춘 개인이 도달한 정치성의 극점이며, 동시에 1980년대 한국 사회의 혁명정신과 민족음악운동이 함께 빚어낸 옹골찬 성과임은 자명하다.

이후 6년여 만에 아내 박은옥과 함께 9집 '정동진/건너간다'(1998)를 발표했다. 한층 더 다채로운 이야기를 건네며 그들의 20주년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9집 앨범을 낸 지 4년 만에 발표한 열 번째 앨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2002)를 발표한다.

2004년엔 55편의 시를 모아 시집 <노독일처·老獨一處>를 발간한다. 2009년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 콘서트'와 중견 미술인들이 마련한 '정태춘·박은옥 30주년 기념 헌정 전시회' 외에는 거의 두문불출하며 첫 개인전을 열고 사진작가로 변신한다. 그러던 그가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이후 10년 만인 2012년, 부인 박은옥을 위한 헌정앨범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2012)를 발표한다.

정태춘은 작사·작곡·편곡 외에도 처음으로 얼후와 일렉 기타의 연주, 그리고 앨범 재킷과 가사지 안의 8장의 사진작품도 선보였다. 수록곡들의 멜로디 라인은 기존의 서정성에서 조금 더 차가워지고 더 가라앉았으며, 청자로 하여금 일말의 숙연함마저 불러일으키는 부부의 노래는 변함없이 훌륭했다.

그의 가사들은 문학에 더 가까워졌고, 음악은 시집에 더 가까워졌음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후 2014년, 이훈규 감독의 7개국 공공재 민영화 비교 다큐 '블랙딜'(Black Deal, 2014)의 깜짝 내레이션을 맡아 울림 있는 목소리로 진정성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2016년. 정태춘이 8집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통해 외치던 부끄러운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아, 대한민국….

최성철·페이퍼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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