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국민이 오만한 권력을 단죄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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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부국장 겸 디지털미디어본부장

고(故) 백남기 농민이 지난해 11월 상경 시위에 나선 것은 쌀값 폭락 때문이었다. 산지 가격(80㎏)이 17만 원 선에서 14만 원 아래로 추락하자 박근혜 대통령의 '21만 원' 공약 준수를 촉구하다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졌다.

사고 이후에도 정부는 수수방관했다. 쌀값은 30년 전 수준으로 주저앉았고 농업의 근간은 붕괴 직전으로 내몰렸다. 농민 생존권을 내팽개친 국가의 책임을 따졌던 백남기 농민은 끝내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위임된 정치권력 남용 고질화
대의제 한계 주권재민 오작동

국민이 언제든 회초리를 들려면
법안·정책 거부권, 국민소환 등
개헌 때 직접민주주의 강화해야


지난 주말 서울에서 고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큰딸 도라지 씨는 "책임자들이 처벌받고, 재발 방지책이 포함된 적절한 사과를 받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울먹였다. 한데, 경찰의 진압 과실이나 사인을 밝히는 일은 더디기만 하다. 쌀값 공약도 책임회피만 들려온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애꿎은 어린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태도 하세월이다. 수장된 세월호처럼 세월호 해법은 정치공학의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다. 진상을 규명해야 재발을 막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이 아닌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우리나라 헌법은 제1조에서 주권재민의 원칙을 앞세운다. 한데, 국민은 왜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번번이 배신감을 느끼는가. 그 좌절감은 엊그제 주말 촛불집회에서 중고생들이 들고 나온 손팻말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런 나라 국민하려고 태어났나 자괴감이 든다.' 어린 학생들까지 '나라의 꼬락서니'를 걱정하는 참담한 현실이 대한민국 헌정의 현주소다.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주권재민의 메커니즘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선출된 정치권력은 주인인 국민의 눈치를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데다, 계파의 이익을 따라 이합집산을 잘해야 공천이 보장되고 정치적 생명을 연장할 수 있어서다. 이처럼 오작동하고 있는 대의제를 바로잡는 것에 난국 타개의 실마리가 있다.

정치체제 개편과 관련해 개헌 논의가 분주하다. 내년에 30주년이 되는 현행 헌법, 즉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탄생한 '87년 체제'의 탈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시정하려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가 제기되고, 중앙집중을 해소하는 지방분권형 개헌도 유력하다. 이 두가지 방향은 유의미하지만 정치권끼리 권력을 나누는 방편에 그치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똑같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점이다. 여전히 국민들은 투표권을 행사하면 차기 선거까지는 심판의 회초리를 들 수가 없다. 아니면 백남기 농민처럼 거리로 뛰쳐나가 물대포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입법권이 국회에 있고, 국민투표 부의권은 대통령이 독점한다. 정치는 사회의 재화를 분배하는 기능이고, 분배의 규칙은 법률을 통해 강행규정화된다. 법치국가에서 입법은 곧 권력을 뜻한다. 국민이 입법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길은 차단되어 있다. 또 국가의 주요 정책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국민이 바로잡는 것도 요원한 구조다.

그 대안은 직접민주주의다. 헌법이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끼칠 법안이나 정책에 대해 법률거부권 혹은 찬반 국민투표를 허용한다면 정치권력의 작동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부울경 지역을 세계 최대 핵 단지로 만들고도 또 강행되는 신고리 5·6호기, 물 흐름을 단절시켜 낙동강을 거대한 그린라테 호수로 만든 8개 보(洑)에 대해 국민이 입법이나 투표로 대응한다고 생각해 보자. 대통령의 일방독주와 의회 무기력의 악순환이 깨질 것이다.

또 소환제를 모든 선출직 공무원들로 확대해 헌법에 명시한다면 정치인들은 임기에 안주할 수 없어 초긴장할 것이다. 아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책임을 묻기 위해 국민들은 대통령 하야 요구 시위를 중단하고 국민소환 운동에 나설 것이다.

우리도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 인 이상의 찬성'으로 국민이 개헌을 발의하는 직접민주주의 규정을 갖고 있었다. 이 규정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 집권을 보장하는 1972년 유신헌법 때 삭제되기까지 무려 18년간 우리 헌법에 있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이 견제받지 않고 무소불위로 남용되면서 한국사회는 곪아 왔다. 주권자인 국민이 언제든 회초리를 들 수 있게끔 시민사회와 정치의 길항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다.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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